1991년 8월22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삼색기를 흔들며 쿠데타군에 맞설 것을 외치고 있다.
1991년 12월26일, 세계 최강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USSR)이 공식 해체되었다. 1922년 12월3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출범한 지 69년 만이었다.
20세기 세계사를 지배했던 초강대국이 평시(平時)에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체제 전체의 근간이 흔들린 사건이었다.
소련은 한때 세계 국토 면적의 약 6분의 1을 차지한 초대형 국가였다. 국토는 약 2240만㎢에 달했고, 인구는 해체 직전 약 2억9000만 명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 무너지다
연방은 러시아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모두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양대 축을 형성하며 핵무기와 재래식 전력에서도 세계 최상위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군사력과 별도로 경제는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중앙정부가 생산과 가격, 투자와 유통을 모두 통제하는 계획경제는 초기 산업화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산성 저하와 기술 혁신의 둔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소비재 부족은 만성화되었고, 사람들이 장시간 줄을 서서 생필품을 구입하는 모습은 소련 사회의 일상이 되었다. 국방비 부담 역시 국가 재정을 크게 압박하였다.
1985년 3월11일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에 나섰다. 그는 경제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정보 공개 및 정치 개방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였다.
개혁은 침체된 체제를 살리기 위한 시도였지만, 오히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적 불만과 민족 문제를 한꺼번에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1989년 동유럽 공산권이 연쇄적으로 붕괴하자 소련 내부의 변화도 더욱 빨라졌다.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는 독립 요구가 거세졌고,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연방을 유지하려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1991년 8월이었다. 8월19일 공산당 보수파와 일부 군·정보기관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저항과 군 내부의 이탈로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감금되어 있던 포로스 별장.
이 과정에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모스크바 러시아 의회 청사 앞에 배치된 전차 위에 올라 시민들에게 쿠데타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이 장면은 세계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며 냉전 종식의 상징적인 사진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쿠데타 실패 이후 공산당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무너졌고, 각 공화국은 독립을 서둘렀다.
1991년 12월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브추크,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슈케비치는 벨라베자 숲에서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은 더 이상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에 합의하였다.
이어 12월 21일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대부분의 공화국이 이에 동참하면서 연방의 해체는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1991년 12월25일 저녁,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 크렘린 궁전 상공에 게양되어 있던 붉은 소련 국기는 내려오고 러시아 삼색기가 게양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26일, 소련 최고회의는 연방의 해체를 공식 선언하였다. 20세기를 상징하던 공산주의 초강대국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소련의 해체 원인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 침체와 계획경제의 비효율, 민족 문제, 정치 개혁의 부작용, 장기간의 군사비 부담, 국제 경쟁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과 정치학에서 널리 논의되는 설명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공산주의를 최초로 국가 체제로 확립했던 종주국마저 기존 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단순한 국명 변경이나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20세기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대한민국의 운동권에도 그대로 향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본산이 사라진 이후, 한국의 친북 성향 운동권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회주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자 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1945년 이후 국제정치를 규정해 온 냉전 질서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양극 체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모스크바 크램린궁에 걸렸던 소련기가 내려가고(왼쪽)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가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을 상징했다면, 소련의 해체는 국제 공산주의 체제의 중심축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이 충격은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국내 언론은 연일 소련 해체를 머리기사로 다루었고,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분석하는 토론회와 학술회의가 이어졌다.
많은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일당독재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주요 원인으로 분석하였다. 소련 해체는 더 이상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 전반을 다시 평가해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운동권은 하나의 목소리만을 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기존 사회주의 이론을 재검토하거나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반면 일부 친북 성향 세력은 소련의 붕괴를 사회주의 자체의 실패로 보기보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노선 변경이나 개혁 실패, 또는 미국과 서방의 압박 등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은 당시 운동권 내부에서도 다양한 논쟁을 낳았다.
이 시기 북한은 소련 붕괴를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 지도부가 혁명 원칙을 버렸기 때문에 국가가 무너졌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체제는 여전히 정당하다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후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더욱 강조하며 체제 결속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이념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 이어 소련까지 무너졌다면, 연구자는 먼저 이들 국가 사이의 공통점을 살펴보게 된다.
계획경제의 비효율, 정치적 자유의 제한, 권력 집중, 언론 통제, 경제 침체는 여러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비교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공통 요소를 검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구 절차이다.
반대로 각각의 사례를 모두 예외적인 사건으로만 설명한다면 공통된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실패를 외부 압력이나 특정 지도자의 개인적 실수로만 환원할 경우, 체제 자체에 대한 검토는 뒤로 밀리게 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일 수 있지만, 동시에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충분히 분석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
1991년은 한국 운동권에도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후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노선 변화와 조직 개편이 이어졌고, 일부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다른 이념적 방향을 선택했다. 반면 일부는 기존 세계관을 유지한 채 북한 체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이어 갔다. 같은 역사적 사건을 두고도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 것이다.
반공주의는 특정 국가에 대한 적대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정치 권력이 경쟁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역사에서 배우려는 태도에 가깝다. 소련의 해체는 그러한 역사적 사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단순히 한 나라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20세기 공산주의 실험 전체를 다시 평가하게 만든 세계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념을 현실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원인을 체제 내부보다 외부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계속 남았다. 냉전은 끝났지만, 냉전의 사고방식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