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 우금치 전투 기록화 일부. ⓒ한국문화재재단 6·25전쟁에 참전해 온몸으로 공산당을 막아내고 나라를 구한 ‘진짜 참전용사’들이 국가로부터 받는 수당이 고작 월 49만 원 남짓이다.
그런데 무려 130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조선을 뒤엎겠다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유족들에게 ‘전북특별자치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유족 700여 명을 대상으로 연 120만 원의 유족수당을 지원한다고 한다.
도대체 동학이 얼마나 대단한 구국의 성전(聖戰)이길래 혈세를 퍼붓고 성역화를 하는 걸까?
텔레비전 드라마나 미디어가 포장한 동학은 웅장하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숭고한 평등사상을 외치며, 탐관오리의 폭정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든 순박한 농민들의 거룩한 투쟁.
좋다. 그렇다면 레거시 미디어와 교과서가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그 숭고한 죽창의 뒷면을 한 번 까보자. 오늘 팩트체크를 도와줄 분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진짜 독립운동가이자 깐깐한 유학자, 매천 황현이다.
그가 남긴 역사서 오하기문(梧下記聞, 국가등록문화재 제747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생지옥을 아주 건조하고 적나라하게 박제해 놓았다.
매천 황현이 집필한 구한말의 역사 기록물 ‘오하기문(梧下記聞)’
이 기록을 천천히 읽어보면, 당신이 알던 낭만적인 역사관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황현의 눈에 비친 동학은 평등을 외치는 사상 단체가 아니라, 광기에 찬 ‘사이비 종교’에 가까웠다.
그는 기록한다. “최시영이 요술을 몰래 전파하였는데 이를 동학이라 하였다.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나 동학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선동했다.”
더 기가 막힌 건 전투 방식이다. “주문을 외우면 질병에 걸리지 않고, 부적을 지니면 총알이 몸을 뚫지 못한다”고 백성들을 세뇌했다. 무지한 농민들은 이 허황된 주술을 믿고 겁 없이 기관총 앞으로 돌격하다가 고기 방패가 되어 떼죽음을 당했다.
그들이 내세운 ‘정의’의 칼끝은 과연 탐관오리만 겨누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황현은 동학군을 명백히 ‘도적’이라 불렀다.
“동학 농민군들은 떼를 지어 마을을 활보하며 부잣집을 털고 여인들을 겁탈했다. 심지어 양반집 처자를 끌어내 강제로 장가를 드는 자도 있었다. 그 무리에 들어가면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사사로운 빚을 받아내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그들은 입교를 거부하는 일반 평민인 속인들을 협박하고 고문했으며 “동학에 들어오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여 억지로 가입시킨 뒤 전투에서 가장 먼저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가입을 거부하는 자에겐 돈을 뜯어냈다. 탐관오리의 수탈을 피해 일어난 자들이, 완장을 차자마자 또 다른 괴물이 되어 힘없는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삥’을 뜯은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맹목적인 ‘반일(反日) 지상주의자’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대목이 등장한다.
일본을 극도로 혐오하여 목숨까지 끊었던 황현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외국 군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군은 땔감과 석탄까지 자기 나라에서 가져왔고, 이르는 곳마다 돈을 주고 물을 사 마셨다. 군령이 엄하여 백성들이 군대가 와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반면 청나라 군대는 음행(강간)과 약탈을 자행해 관민이 모두 원수 보듯 하였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우금치 전투 역시, 무능한 조선 관군이 광기에 찬 동학군을 제압하지 못해 일본군에게 진압을 ‘요청’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조선이 조선의 백성을 막지 못해 외세의 총알을 빌린 치욕스러운 내전. 이것이 황현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1894년 조선의 진짜 팩트다.
역사는 선과 악이 뚜렷하게 나뉘는 1차원적인 히어로 무비가 아니다. 시대의 모순 속에서 선과 악, 정의와 야만이 복잡하게 뒤엉켜 굴러가는 핏빛 진흙탕이다. 매천 황현은 그 진흙탕 속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동학군의 약탈도, 조선군의 무능도, 일본군의 엄격함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런데 2026년의 우리는 어떤가. 역사의 입체적인 맥락은 깡그리 거세해 버리고, 오직 ‘반일과 민중 혁명’이라는 달콤한 반쪽짜리 신화만 남겨 절대적인 성역을 쌓아 올렸다.
왜일까? 선악의 프레임을 짜야 대중을 선동하기 쉽고, 성역을 만들어야 거대한 국가 예산으로 기념 사업, 수당, 유공자 지정이라는 빨대 꽂아 빨아먹을 수 있는 합법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동학의 깃발 아래 약탈당하고 고기 방패가 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조선의 평범한 백성들. 그들의 피눈물은 외면한 채, 역사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하는 이 징그러운 역사 팔이 카르텔.
동학 유족이라는 정체불명의 타이틀에 매년 120만 원씩 세금을 퍼부을 돈이 있다면, 제발 지금 당장 폐지 주워 살아가는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들 밥상에 고기반찬이나 하나 더 올려드려라. 국가가 누구에게 진짜 빚을 지고 있는지 그 얄팍한 영수증조차 제대로 끊지 못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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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난은 농민들의 무장봉기였는데 전라도가 고향이신 나의 외조모께서 직접 목격하셨다고 한다.
외조모가 사시던 마을에 이들 난적이 들이닥쳐서 마을 집집마다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예배 같은 것을 드리는데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외우더라는 것이었다.
외조모 말씀을 들어보면 이들은 광주사태 당시 눈이 뒤집혀 군경 무기고를 습격해서 탈취한 총칼을 들고 날뛰던 그런 폭도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빨갱이들이 그리는 그런 식의 멋있는 협객들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무식한 농군들이었으며 지금의 북한처럼 극도로 부패하고 극도로 무능하여 백성을 전혀 돌보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불만때문에 주동자들의 선동에 휘둘려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동학난이 진압된 뒤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인데 동학난이 진압되자 그 간부들 중 일부가 일진회라는 친일 조직에 가담하여 조선은 일본과 합쳐야 한다는 한일합방론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지금 김대중에 짓눌린 전라도가 득세를 하면서 등장한 전라도 사관이 웃기는 소리들을 많이들 창작해서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양 역사책에 올리느라 바쁜데 그 중의 하나가 단순한 민란이었던 동학난을 동학 농민혁명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여서 마치 무슨 그럴듯한 혁명운동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려 들고있다.
동학난이 정말 그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면 그 후 무엇인가 변화를 가져온 족적을 남겼어야 하지만 동학난은 그저 난으로 끝나버렸고 자기들이 내세웠던 "반일"과는 정반대인 "친일" 보다 더한 한일 합방론이나 들고나왔던 망국조직인 "일진회" 외에는 아무런 이렇다할 족적을 남긴 것이 없다는 덕이다.
이러다가 프랑스 혁명 때 나온 노래 라마르세이유처럼 도요다 다이쥬우(김대중)의 고향이름을 딴 "신안 흑산도"란 이름의 이상한 주문같은 노래를 또 애국가 대신 국가로 제정하자고 나설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을 느끼게 한다.
아무 것도 할줄도 모르고 게을러서 일하기도 싫어하면서 주둥이만 까져서 거창하게 이야기나 잘 지어내서 떠들기 좋아하는 전라도 사람들이니 능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아 정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