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부. 불신의 구조를 해부하다 (1~5편)
① 불신은 감정 아닌 학습
② 확증편향 사회의 등장
③ 정책이 안정 장치 아닌 위험 변수
④ 불신 사회의 다섯 가지 징후
⑤ 해법은 신뢰 회복 아닌 불신 관리
불신 사회는 혼란의 사회가 아니다. 거리의 소란이나 제도의 전면적 붕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제도는 작동하고, 행정은 돌아가며, 시장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안정은 신뢰의 결과가 아니라 기대가 낮아진 상태 위에서 유지되는 안정이다. 사회는 믿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버티고 있다.
불신 사회의 첫 번째 징후는 의심이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 되는 현상이다.
새로운 정책이나 제도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묻기보다 언제 바뀔지를 먼저 계산한다. 선의는 전제로 주어지지 않고, 숨은 의도부터 추정된다. 의심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 경험에서 학습된 합리적 출발점이 된다.
두 번째 징후는 공적 판단의 붕괴다.
사회적으로 중요할수록 사안은 공동의 기준에 따라 토론되기보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된다. 판단은 공론장에서 형성되지 않고, 개인의 계산 속에서 완성된다. 이때 사회는 의견이 많은 사회가 아니라, 판단이 사라진 사회로 이동한다.
세 번째 징후는 각자도생의 합리화다.
불신 사회에서 각자도생은 이기심의 표현이 아니다. 제도가 보호 장치로 인식되지 않을 때, 개인이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선택은 합리적이다. 공동체적 선택은 이상으로 밀려나고, 개인적 회피는 현실적인 전략이 된다.
네 번째 징후는 기록 없는 책임 구조다.
결정은 반복되지만, 그 결정의 이유와 기준은 남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존재하지만, 책임의 위치는 흐릿해진다. 이 구조에서는 잘못을 묻기 어렵고, 수정은 더 어렵다. 책임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책임을 기록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다섯 번째 징후는 조용한 기능 붕괴다.
제도는 유지되지만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정책은 집행되지만 보호 기능을 상실하고, 규칙은 존재하지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능의 붕괴는 선언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같은 상태를 반복한다.
이 다섯 가지 징후는 각각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서로를 강화하며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의심이 기본값이 되면 공적 판단은 약화되고, 공적 판단이 무너지면 각자도생은 합리화된다. 각자도생이 확산될수록 책임은 기록되지 않고, 책임이 남지 않을수록 기능 붕괴는 조용히 진행된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비정상 상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 사회의 위험은 파국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불신 사회는 위기를 겪고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이미 위기에 적응을 마친 사회다.
그래서 변화의 요구는 줄어들고, 조정의 압력도 약해진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는 더 이상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각자가 살아남는 법을 더 정교하게 학습한다. 불신 사회는 이렇게 완성된다.
불신 사회의 징후는 소란이 아니라 적응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는 작동하지만, 기능은 조용히 붕괴된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불신 사회에 대한 해법을 ‘신뢰 회복’이 아니라, 불신을 관리하는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