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체제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분위기가 담기면 작품은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영화 스틸컷]
사람은 원래 질문하는 존재다. 왜 그런지 묻고, 정말 맞는지 의심하고, 다른 생각은 없는지 확인한다. 문명은 이런 질문 위에서 발전해 왔다. 철학도, 과학도, 문학도 결국은 인간의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질문 자체가 위험해지는 시대가 됐다.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한 사람의 태도와 의도를 먼저 심판하는 분위기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굳이 그 질문을 왜 하느냐?” “당신은 어느 편이냐?”
이런 말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먼저 침묵을 배운다. 틀린 말을 하지 않으려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속마음을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된다. 말하는 것보다 조용히 있는 편이 더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다.
20세기 소련에서는 수많은 작가가 국가의 눈치를 보며 글을 써야 했다. 혁명과 체제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분위기가 담기면 작품은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작품은 혁명 속 인간의 고통과 혼란을 묘사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소련 당국은 이 작품을 매우 불편해했다. 혁명을 무조건 찬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은 소련 안에서 출간되지 못했고 해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이후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엄청난 압박 속에서 수상을 거부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소련이 이 작품을 문학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장이 나쁘다거나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공격한 것이 아니다. 대신 “왜 그런 시선을 가졌는가”를 문제 삼았다. 혁명에 대한 작은 의심조차 위험하게 본 것이다. 질문 자체가 공격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많은 교수와 작가, 예술가들이 공개 비판과 투쟁대회의 대상으로 끌려나왔다. 중국의 대표적 작가 老舍(라오서) 역시 홍위병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과 폭행을 당했다.
그는 극심한 압박과 수치 속에서 1966년 베이징 태평호(太平湖)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이 갑자기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대가 의심과 거리 두기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늘 옳아야 했다. 체제는 틀리면 안 되었다. 질문은 배신처럼 취급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토론보다 자기검열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이 말 했다가 문제 생기는 것 아닌가?” “괜히 입 열었다가 찍히는 것 아닌가?”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
이런 분위기가 오래되면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합의의 침묵이 아니라 공포의 침묵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정말 동의해서 입을 닫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두려워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섬뜩하게 묘사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1984’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이 소설에서 생각 자체가 범죄가 되는 사회를 그렸다.
작품 속 사람들은 행동보다 생각 때문에 두려워한다. 국가가 가장 무서워한 것은 총을 든 반란이 아니었다. 인간 내부에서 시작되는 의심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친구 앞에서도 진심을 숨긴다. 어느 순간부터 위험한 것은 틀린 행동이 아니라 틀린 생각 자체가 된다.
이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현대 사회는 과거처럼 국가가 직접 작가를 체포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압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내용보다 먼저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저 사람 의도가 이상하다.”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느냐.” “저건 위험한 생각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점점 민감한 주제를 피하게 된다. 정치 이야기 피하고, 사회 문제 이야기 피하고, 논란이 생길 만한 말은 삼킨다. 회식 자리에서도 조심하고, 학교에서도 조심하고, 인터넷에서도 조심한다.
이때 사회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문학은 원래 인간의 흔들림을 다루는 장르다. 인간은 언제나 망설이고, 후회하고, 의심한다. 좋은 소설 속 인물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흔들리고 실패하며 자기 생각조차 다시 돌아본다.
그런데 사회가 “의심 없는 인간”만 요구하기 시작하면 문학도 점점 메말라간다. 살아 있는 인간 대신 정답만 반복하는 인물이 늘어난다.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말을 많이 하자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다. 질문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충돌도 생기고 논쟁도 생긴다. 때로는 시끄럽고 불편하다. 그러나 그런 사회가 오래 버틴다.
반대로 모두가 눈치 보며 침묵하는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돼 보여도 내부에서는 사고력이 조금씩 죽어간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 생각보다 주변 분위기를 먼저 살핀다.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무엇이 안전한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침묵의 강요는 단순히 입을 막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