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9)는 미국의 거장 테리 길리엄 감독이 스페인 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 명작 ‘돈키호테’를 모티프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 스틸]
문학은 오래전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사람은 생각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된 생각 때문에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사상이 인간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면 그것은 더 이상 의견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 신념, 자존심과 결합한 또 하나의 자아가 된다. 그 순간부터 사람은 사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게 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를 가장 먼저 보여준 작품 가운데 하나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평범한 여인을 귀부인으로 믿으며, 허름한 여관을 성으로 여긴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기사도 정신은 그의 독서 취향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었다. 그래서 현실은 사상에 맞추어 해석될 뿐, 사상이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는 않는다.
러시아 문학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든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을 ‘비범한 인간’이라고 믿는다. 그는 위대한 인간은 기존의 도덕과 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상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하나의 철학적 가설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생각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저지른다. 살인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준 것은 범죄심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결합한 사상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먼 길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논쟁이 단순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상은 언제나 인간의 운명이 된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권력은 사람들의 행동만 통제하지 않는다. 기억과 언어, 감정까지 지배하려 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구호는 단순한 정치 선전이 아니다. 개인의 정체성을 국가가 대신 만드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보다 체제를 더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 그는 스스로의 생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사상이 인간을 완전히 흡수한 모습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타난다. 무인도에 남겨진 소년들은 처음에는 협력과 규칙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집단의 새로운 신념이 형성된다. 두려움과 폭력이 공동체의 가치가 되고, 그 가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적으로 규정된다. 평범한 아이들이 잔혹한 폭력에 참여하는 이유는 타고난 악 때문이 아니다. 집단의 사상이 개인의 정체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못하는가? 왜 반대 의견을 들으면 논쟁이 아니라 모욕으로 받아들이는가? 왜 사실보다 신념을 먼저 지키려 하는가? 소설은 그 답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는다. 사상이 ‘나의 생각’일 때는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수정은 자기부정처럼 느껴진다.
현실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낯설지 않다. 정치, 종교, 민족, 이념, 지역, 세대는 모두 정체성이 될 수 있다.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의식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사실보다 소속감을 먼저 지키려 한다. 자신의 진영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와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지식을 방어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방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체성이 강할수록 자신은 더욱 객관적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판단은 상식이고 상대의 판단은 선동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상대도 똑같이 생각한다. 서로가 진실을 독점했다고 믿는 순간 대화는 멈추고, 남는 것은 충성 경쟁뿐이다.
위대한 문학은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보여준다. 독자는 돈키호테를 보며 웃다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라스콜니코프를 보며 충격을 받다가 자신의 확신을 돌아보게 된다.
오웰의 암울한 세계를 읽으며 전체주의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 속에도 작은 ‘빅 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지 묻게 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문학은 독자에게 설교하지 않는다. 인물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문학은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뛰어난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철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설명하지만, 문학은 왜 인간이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지를 보여준다. 철학은 논리를 제시하고, 문학은 삶을 제시한다.
독자는 논문보다 소설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의 운명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사상이 어떻게 한 인간의 성격이 되고, 습관이 되고, 결국 운명이 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상을 가진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사상이 인간을 소유하는 순간 자유는 사라진다. 위대한 문학은 그 경계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독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남긴다.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은 하나의 생각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