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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스님 호국칼럼] 제헌절에 담긴 역사의 숨결
  • 응천스님 대한불교호국종 총무원장
  • 등록 2026-07-10 14: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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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그해 7월12일 헌법을 의결하고 7월 17일에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제헌헌법)을 공포했다. 제헌국회 모습.대한민국 헌정사의 출발점인 제헌절은 단순한 법률 제정의 날을 넘어, 수천 년 이어온 민족사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다진 날이다. 1948년 그 뜨거웠던 여름, 제헌헌법이 탄생하기까지의 긴박했던 순간들과 그 주역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조선 건국일과 맞닿은 민족사의 정통성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안이 최종적으로 가결(통과)된 날은 사실 7월 12일이다. 하지만 당시 국회는 이 기쁜 소식을 바로 발표하지 않고 닷새를 기다려 7월17일에 헌법을 공포했다.


그 이유는 바로 조선왕조의 건국일(음력 7월17일)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식민 지배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민족사의 정통성을 당당히 이어받고,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민국이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국가임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상징적인 의도가 담겨 있었다. 법통의 중연(重緣)을 통해 국가의 뿌리를 확고히 하려 했던 선열들의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초기 헌법 초안을 작성한 학자들은 권력의 집중과 독재를 막기 위해 국무원책임제(내각책임제)와 양원제(국회를 두 개의 의원으로 나누는 것)를 구상했다. 그러나 초대 의장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제가 아니면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겠다"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헌법 공포를 불과 며칠 앞둔 7월 초순, 한 여관방에서 밤샘 격론이 벌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하나의 국회)로 헌법의 골격이 급하게 수정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처럼 급박한 권력 구조의 변동 속에서도 헌법을 만들기 위해 선출된 제헌의원들을 뽑는 1948년 5·10 총선거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서 찬연히 빛난다. 당시 투표율은 무려 95.5%를 기록했으며, 이 경이로운 기록은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고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나라,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세우겠다는 온 국민의 염원과 뜨거운 열망이 이 한 장의 투표용지에 집약되었던 것이다.

헌법을 완성한 시대의 주역들


이 거룩한 제헌헌법은 국회 내 ‘헌법기초위원회(위원 30명, 전문위원 10명)’를 구성해 정식 심의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당대 최고의 법학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참여 학자 중 현민(玄民) 유진오 박사는 제헌헌법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제헌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당대 유일의 공법학자였다. 그가 작성한 ‘유진오 초안’이 제헌헌법의 위대한 뼈대가 되었다.


유진오 박사는 본래 독일식 바이마르 헌법을 모델로 삼아 부의장 중심의 내각제와 근로자의 이익 균점권 등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경제 조항을 대거 넣었으나, 정치적 타협 과정에서 대통령제로 수정되는 과정을 직접 겪으며 국익을 위한 대타협을 이루어냈다. 


그 밖에 김준연, 서상일 등 당대의 선각자들이 사리사욕을 내려놓고 오직 국가의 백년대계만을 바라보며 헌법 제정에 헌신하였다.

이재명 정부의 헌법 유린과 좌파 세력의 민낯

그러나 선열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이 위대한 헌법정신은 오늘날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난 이재명 정부 시절 자행된 초법적 행태와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좌파 세력들의 위선적인 민낯을 마주하며, 국민들은 국가 정체성이 통째로 흔들리는 참담한 붕괴를 목도하고 있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제101조는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정권과 거대 야당이 보여준 행태는 오직 일인(一人)의 정치적 안위를 비호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한 ‘헌법 유린의 역사’ 그 자체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뒤흔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폭주이다. 이는 특정 정치인의 개인 비리와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헌법적 가치인 ‘적법절차의 원칙’과 국회의 심의 권한을 무력화한 헌정사상 최악의 의회 폭거였다.


재판 중인 중대 범죄 혐의자를 옹호하기 위해 판·검사 탄핵안을 남발하고 사법부를 겁박하는 행위는 헌법이 규정한 권력분립의 원칙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국회라는 민주적 제도를 방탄용 도구로 삼아 다수의 힘으로 사법 정의를 짓밟는 ‘법률을 통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 제23조가 보장하는 국민의 재산권을 무시한 반시장적 부동산 규제 폭탄과 무분별한 포퓰리즘식 재정 중독은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도탄으로 몰고 갔다. 시장의 원리를 무시한 채 이념적 잣대로 강행된 정책들은 결국 서민의 주거 사다리를 걷어찼고, 청년 세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정과 정의를 독점한 듯 외치던 좌파 세력들은 대장동·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등 단군 이래 최대의 권력형 비리 앞에서는 철저히 침묵하거나 궤변으로 이를 정당화하는 극단적인 위선을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시도하고, 자신들의 정파적 이념에 맞지 않는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는 행태는 제헌헌법이 선포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헌법정신이 실종되고 국가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미증유의 가치 혼란을 겪고 있다. 사법 정의가 무너지고 법치주의가 특정 정치 세력의 방탄용 도구로 전락한 현실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바로 1948년 그해 여름, 나라를 세우기 위해 밤을 새우며 대타협을 이뤄냈던 제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법치를 바로 세우고 무너진 정의를 깨우기 위해, 필자는 오늘도 광화문 광장에서 간절하고도 엄중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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