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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의 전라도에서] 인촌을 기리며
  • 정재학 칼럼
  • 등록 2026-07-12 12: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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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7월 장마철, 올해도 어김없이 담 밑엔 봉선화가 피었다. 빗속에서 그냥 아름답다. 진분홍 꽃잎 아래로 빗방울을 흘려보내면서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 저렇게 홀로 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눈빛으로 정스러운 꽃. 옛사람들은 왜 울 밑에 핀 봉선화를 보고 ‘처량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필자는 봉선화꽃을 볼 때마다 인촌 김성수, 그분을 떠올리곤 한다. 인촌 그분은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지만, 그리고 민족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지만, 그러나 어떤 시대적 오해 속에서 버림받은 인물이 되어 있다.

 

김성수는 일제시대 언론인이자 사업가였으며 교육자였다. 1891년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의 큰 부자였던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8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했고, 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 1917년 섬유업체‘'경성직뉴’를 연이어 인수하여 교육가이자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인촌은 경성직뉴를 3·1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 10월 경성방직으로 확장했고,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그리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을 이어갔다.

 

또한 인촌의 삶은 독립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촌은 숨은 독립운동가로서 오랜 기간 독립운동을 지원해 온 인물이다. 

 

그가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에 매진하던 시기, 숙직실에서 3·1운동을 현실화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귀국해 와세다대학 선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을 찾았고, 이후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현상윤·송진우 등이 거사를 논의했다. 


뒤이어 최남선·최린까지 합류하며 3‧1운동의 싹이 텄다. 이것이 인촌 김성수를 빼놓고 3‧1운동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중앙고등학교 서양식 건물 사이에 자리한 작은 한옥이 당시 3·1운동이 배태된 학교 숙직실이다. [한미일보 자료사진]

3·1운동 이후, 인촌 김성수는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자본이 필요하다고 판단,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경성방직회사를 세웠다. 이어 민족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했으며, 경영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훗날 고려대학교의 초석을 닦았다. 

 

인촌의 독립운동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다. 독립군이 군자금을 요청하면, 금고를 열어둔 채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화 중에 김좌진 장군에게 ‘소 백 마리를 사고도 남을’ 자금을 지원하고,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에도 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로서는 비밀 유지를 위해 기록이 남기 어려운 지원이었지만, 해방 이후 김구와 이승만이 큰 고마움을 표시한 점을 감안하면 사실에 무게가 실린다. 해방 뒤 인촌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힘을 보탰고, 부통령직을 맡아 대한민국 건국이념과 국가 질서 정착에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인촌은 타계 후에 1962년 건국공로훈장(대통령상)을 받는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인촌의 행적이 친일로 규정되면서, 서훈은 취소되었다.

 

망국(亡國)의 인사가 한 시대를 살다 가기엔, 너무도 파란 많은 시대였고 일생이었다. 일제의 눈치를 보면서, 때론 고개를 숙이고 때론 뜻을 감춰야 하는 시대적 운명을 인촌은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1955년 타계하기 전까지 인촌의 마지막 역시 조국을 위한 헌신이었다.

 

민족교육을 수행하면서 민족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역설을 누가 이해하여 줄 것인가. 지금 인촌의 고향집엔 그를 기리는 무엇 하나가 없다. 혹시나 고향집 울타리 밑에 봉선화라도 한 잎 피었으먼 싶어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인촌을 일제시대를 지켜온 ‘살아있는 인문학’이라 정의한 적이 있다. 인촌이 없었으면 우리의 문학도 예술도 교육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많은 문인이 인촌의 보호를 받았다. 술 마시다가 술값이 없으면 노상 인촌을 찾았다고, 시 ‘논개’의 수주 변영로는 ‘명정 40년’이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조선의 시인과 문인을 보호하고 그들의 작품세계를 껴안으며, 혹독한 일제시대를 건너간 인촌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를 경험해보지 않은 까마득한 후인(後人)들에게 인촌은 친일매국노로 매도된다.

 

아름답지만 처량한 꽃.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겨우 울타리 밑 한구석에서 아기자기한 진분홍꽃, 연분홍꽃을 피우는 봉선화의 슬픔이 집힐 듯 다가온다.

 

필자도 전북 고창 출신이다. 그동안 인촌의 생애를 추억하면서, 그분의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물음표를 띄어본 적이 없다. 확신하건대, 인촌은 소리 없이 애국의 길을 걸은, ‘초라한 위대함’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인문학이 그분의 손에서 지켜진 이래, 대한민국은 지금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고 있는 것이다.

 

담 밑의 봉선화를 바라본다. 봉선화 꽃잎 위에 눈물처럼 흐르는 장맛비. 그리고 친일매국노로 버림받은 인촌의 삶. 안내판 하나 없는 그분의 고택 앞에서 통곡이 나온다. 

 

‘고창의 눈물’이다.

 

덧글: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좌파 정권에서 서훈을 받고 독립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박헌영 아내 주세죽도 독립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고, 심지어 박지원 아비 박종식도 독립유공자입니다. 그러나 인촌 선생께선 2018년 문재인에 의해서 서훈이 박탈되었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울 밑에 선 봉선화’는, 1926년 홍난파의 곡에 김형준이 가사를 넣은 우리나라 최초 가곡입니다. 혹시나 이 노래가 가슴을 울리거든, 여러분께선 한 번쯤 인촌 김성수 선생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제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 정재학 시인

 

시인, 국가유공자, 칼럼니스트, 박정희 대통령 홍보위원, 전라도에서 36년 교직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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