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국가가 베푸는 은전이나 혜택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가 국가의 권능에 대항하여 확보한 ‘현대적’ 삶의 영역이며, 국가는 그 영역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한미일보
이 시점에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아니, 꼭 필요하다. 이 작품 초판이 출간된 것은 1949년 6월8일 영국 런던, 세커 앤드 워버그 출판사에서였다. 닷새 뒤에는 미국에서도 출간되었다.(George Orwell, Nineteen Eighty-Four, Secker & Warburg, 1949).
책이 출간되었을 때 오웰은 결핵으로 요양원에 있었고, 7개월 뒤인 1950년 1월21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84’는 오웰이 생전에 완성하고 출간한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흉내 낼 수 없는 무서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가상적 알레고리의 소설 세계가 압도적인 힘으로 바야흐로 도래할 전체주의의 위협을 독자들 앞에 생생하게 제시한다. 작중에서 독재자 오브라이언이 말한다. 그는 내부당(Inner Party)의 고위 간부이자 사상경찰의 핵심 인물이다.
조지 오웰이 경고한 전체주의의 최종 단계 “너는 이러하다”
옛날 전제주의(despotisms)의 명령은 “Thou shalt not”, 곧 “너는 (무엇인가를) 해서는 안 된다”였다. 전체주의자들(totalitarians)의 명령은 “Thou shalt”, 곧 “너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명령(Our command)은 “THOU ART”, 곧 “너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곧 “너는 이러하다”이다. (조지 오웰, ‘1984’, 제3부 제2장)
이렇게 조지 오웰은 새롭게 출현하는 전체주의의 한 차원 더 격상된 단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했다.
처음에 전체주의는 특정한 행위들을 금지한다. 너희들은 독립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민족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음에 전체주의는 특정한 행위들을 강요한다. 너희들은 천황의 신민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은 전쟁 동원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면, 전체주의는 한 인간의 내부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너희들은 천황의 신민이 되어 있다. 너희들은 자동적으로 신민으로 살아간다. 이 단계는 의식을 통과하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권력이, 당이 원하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의 출현을 의미한다.
필자는 지금 일제 말기의 천황제 파시즘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십여 년 전 연구서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2011)를 준비하던 중 ‘신체제’의 논리를 밝히는 어떤 책에서 필자는 천황이 그가 다스리는 일본인들의 ‘뇌수’에 해당한다는 표현을 발견했다.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소비에트의 레닌이즘, 스탈리니즘과 함께 북한 주체사상의 전사(前史)의 하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천황제 파시즘, 그리고 주체사상 같은 것들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THOU ART”(=You are), 곧 의식의 무의식적 자동성, 의식을 동원하여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국가와 당이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민 또는 인민대중은 천황 또는 수령의 손이고 발이 되어 바로 ‘뇌수’가 시키는 그대로 아무 불만 없이 움직인다.
이 새로운 단계의 ‘전체주의’와 ‘전통적인’ 전체주의의 관계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먼저, 오웰이 ‘너희들은 이것을 해야 한다’고 묘사한 전체주의, 곧 ‘전통적’ 의미의 전체주의란 오웰이 생전에 끔찍하게 경험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그 특수한 변형태로서의 히틀러 나치즘,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형태를 나타낸 프랑코의 스페인 통치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전체주의는 국가의 오래되고도 절대적인 지배와 그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의 자유를 위한 노력을, 그렇게 해서 얻어진 성과들을, 그 가장 값진 고갱이에 해당하는 ‘자유’를 개별적 인간들로부터 ‘회수’하려 한 체제이자 이념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지배 아래서 이탈리아 사람들, 독일 사람들은, 유럽의 자유민주주의가 명예혁명(1688), 미국혁명(1776), 프랑스혁명(1789) 등 세 단계의 혁명을 통해 획득한, 개인적 인간의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그들의 국가에 회수당했다.
그들은 무솔리니와 히틀러 같은 ‘국가’가 생각하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국가가 품는 의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들은 정치화되었고, 곧 집단화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산 인간의 개별자적 특성을 잃고 이탈리아·독일 민족주의의 충성스러운 구성원으로 ‘전락당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웰이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고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전체주의는 전체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전체주의는 단순히 ‘독재의 강도’의 양적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단계 더 세어진 전체주의가 아니라 전통적 전체주의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전체주의, 국가-사회-개인의 새로운 관계 형식의 창출을 의미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역사의 유령들 ‘천황제 파시즘’에서 ‘주체사상’까지
사실, 국가가 생겨난 뒤의 인간 사회는 순수한 자연사회일 수 없었다. 국가는, 아감벤이 조에(Zoe)와 비오스(Bios)를 통해서 말했듯이, 인간 각자의 생물학적인, 날 것 그대로의 목숨을 회수하여 그네들의 법적 자격, 정치적 신분, 재산 관계, 가족 관계, 생명의 보호 여부, 발언권의 조건들을 규정해 왔다.
국가의 탄생 이후 대부분의 사회는 국가에 의해 개인들이 규정되는 사회, 곧 ‘국가사회’였고, 개인은 그런 의미에서 ‘국가적 개인’이었다.
무솔리니며 히틀러의 전체주의는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민주주의를 억누르고, ‘국가사회’의 권능, 곧 인간의 자격과 삶의 형식을 국가가 규정하는 권능을 다시 한 번 극대화하려는 시도였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서론)
여기서 더 나아간 천황과 수령의 새로운 전체주의에서, 이제 국가는 신민들, 인민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단계를 넘어, 그들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그 존재 자체를 ‘생산’하려 한다.
이 단계에서 ‘국가사회’는 개인들을 단순히 집단적 정치로 동원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국가 권력, 곧 ‘당’은 자신들의 신민, 인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요구하는 인간 그 자체가 되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체제의 개인들은 수령-당-국가 체제를 ‘살아간다’.
그들은 이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그네들의 직장, 학교, 청년 조직, 여성 조직, 문학과 예술, 언론, 사상생활의 모든 것이 당과 국가의 유기적 네트워크 안에 놓인다. 그들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화되고 당의 것이 된다. 인민은 수령-당-대중의 생명체적 전체성 안에서만 그 존재 의미가 유지된다.
전통적 전체주의와 유신의 차이점
이 점에서 한국인들이 1970년대에 겪었던 유신체제와 북한의 주체체제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억압의 양적 차이가 아니라 국가화의 질적 차원의 차별성이다. 유신체제의 국가는 개인들을 한정적으로 정치에 참여시키고 동원했다. 거기서 개인들은 권력이 원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갔다.
이 개인들의 사회는 국가주의적이면서도 국가의 바깥에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기업, 교회, 대학, 문단, 가족, 시장, 저항적 지식인이 존재할 수 있었다. 국가는 이들을 통제하고 억압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당-국가 체제의 유기적 일부로 변형시키려 하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이념은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개인들을 창조하려 했지만 그들 모두를 정치적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섬세하고도 세심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와, 사회주의 전체주의 또는 유기체적 생명주의는 같지 않다.
이제 논의를 위한 긴 전제적(前提的) 검토를 겨우 끝낸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보자. 12·3 이후, 한국 사회는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나? 이 글을 쓰는 오늘은 7월13일, 모두 합쳐 588일이다. 1년 하고 223일째 날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는가?
12·3 이후의 대한민국: 자유의 회수와 권력 독점
지나간 이 시기는 여러 면에서 각기 특성화할 수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전체주의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전체주의적 국가 권력의 급속한 형성 과정이자 이러한 권력에 의한 국민 각자의 ‘자유의 회수’의 과정이었다고 단적으로 특징화할 수 있을 것이다.
2년5개월이 못 되는 사이에 부정선거 세력은 의회 권력을 토대로 행정 권력을 장악했고, 나아가 사법 권력을 자신들의 실질적 통제 아래 두었다. 재판은 마비되거나 권력의 입맛대로 선고되었다. 탈영병 전력을 가진 장관이 군대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한시라도 부패할 수 있는 경찰이 검찰을 무력화시켰다. 국회에는 독점과 전횡이 있을 뿐 어떤 실질적 대화나 타협도 없다.
입법·행정·사법의 극단적 독점 체제는 이 독점 체제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개별적 인간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법률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어 왔다. 자유롭고 투명한 선거,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선택된 대리자들이 주권자들을 대신해 잠정 통치한다는 국민주권의 이상은 땅에 떨어졌다. 자유로운 국민이 정치공동체의 주인이라는 원리는 전자시스템을 이용한 불법선거에 의해 해체되어 버렸다.
그것은 부당한 권력이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가로채 간 것이었다. 조작된 ‘국민의 의사’로 개인들에게 부당한 복종을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들의 권리를 침탈한 것을 넘어 개인들을 부당한 국가권력의 의지 아래 집단적·집합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이었다.
개인들은 불법적인 권력 의지, 조작된 여론, 실체 없는 다수에 짓눌려야 했다. 심지어 선거부정은 이를 행하는 자들과 이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정치적·심리적으로 정당화되기조차 했다. 진보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해 ‘비상수단’쯤은 허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이스북 같은 데 오르내리는 문학인들, 지식인들의 논점 회피식 글들의 밑바닥에는 이런 정당화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선거라는 ‘사실’을 적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음모론자라 낙인찍는 이들의 심리 속에는 알게 모르게 부정선거를 통해서라도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피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개정 정보통신망법의 본질은 아래로의 감시, 위로의 권력 집중
지난 7월7일 발효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불법적인 선거, 부정의한 권력은 현실을 ‘재작성’하려는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불법적인 선거 결과와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현실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부정선거를 바로잡으려는 이들은 극단적 예외자들로 취급되어야 하고 압도적인 선량한 다수는 합리적으로 자신들을 지지해야 한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어야 한다. 거꾸로 서고 물구나무서지 않으면 전도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가짜뉴스’를 단죄하는 문제가 절박한 현안으로 떠오른다.
개정 정보통신망법의 주요 내용은 ‘허위조작정보’ 개념을 신설하고, 정보통신망을 통한 유통행위를 금지하며, 대규모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신고 대응, 운영정책 수립, 투명성 보고서 공표 등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또 허위·조작정보 유통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하게 하는 규정도 포함된 것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7·제44조의10·제44조의12·제44조의14, 법률 제21305호, 2026.7.7. 시행)
겉으로 내세운 이 법의 ‘명분’은 허위조작정보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악의적 정보 유통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며, 온라인 플랫폼의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의 감춰진 본질은 ‘감시와 판단의 위계적 확산’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전체주의적으로 ‘회수’하고 그럼으로써 부당한 권력 메커니즘을 승인하지 않는 ‘다른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가능하다면 소멸이라도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감시와 판단의 위계적 확산’. 이 정보통신망법의 위험은 국가가 국민의 모든 발언을 직접 심사한다는 데에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국가가 법률을 통하여 표현의 허용과 금지, 정상과 일탈,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설정하고, 행정부와 법원, 플랫폼 운영자, 언론과 사실 검증 기구, 각종 사회 조직과 시민들을 하나의 위계적 감시 체계 안에 배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구조에서는, 얼핏, 감시와 판단의 수행자가 여러 곳으로 확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권력이 수평적으로 분산되는 것은 아니다. 최상위에는 법률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가권력이 있으며, 행정부와 법원은 그 기준에 공적 권위와 강제력을 부여한다.
플랫폼과 언론, 사실 검증 기관과 사회 조직은 그 기준을 해석하고 일상적으로 적용한다. 시민은 다른 시민의 발언을 신고하고 평가하며, 마지막에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말과 생각을 검열한다.
그러므로 이 구조를 ‘판단 권력의 분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판단과 감시의 행위는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만, 그 기준과 최종적 제재권은 위계적으로 집중된다. 또는 더 압축하면, 감시는 아래로 확산되고, 권력은 위로 집중된다.
이것은 국가가 사회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거나 민간에 넘겨주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여러 중간 기관과 사회적 행위자를 위계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개인과 사회를 더욱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이다.
다음, ‘표현의 자유’의 전체주의적 ‘회수’와 ‘다른 개인’의 고립과 소멸 시도.
‘표현의 자유’는 왜 특별한가? 필자가 듣기로,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국가가 국민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 조항의 핵심은 국가 권력에게일정한 금지선을 그었다는 데 있다. 국가는 개인의 종교, 표현, 언론, 집회, 청원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미국 수정헌법 제1조, 1791).
여기서 ‘자유’는 국가가 베푸는 은전이나 혜택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가 국가의 권능에 대항하여 확보한 ‘현대적’ 삶의 영역이며, 국가는 그 영역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특히 ‘표현의 자유’는 여러 기본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자유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려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부당한 수색과 체포를 비판하려면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 재산권이 침해되었다고 호소하려면 ‘청원과 집회의 자유’가 필요하다.
선거가 불공정했다고 주장하려면 기록하고 보도하고 논쟁할 자유가 필요하다. 학문의 자유 역시 기존 통설과 다른 가설을 제시하고 반박할 수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조건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여러 자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자유를 인식하고, 주장하고, 방어하고, 다른 사람과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자유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가 사회적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는 ‘말할 자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공적 세계 속에 ‘자기 자신’으로 나타날 자유이며, 국가와 다수의 판단과 ‘다른 존재’로 나타날 자유다.
‘다른 개인’이란 누구인가? 자유로운 사회는 단순히 많은 개인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다. ‘다른 개인’은 단순히 취향이나 성격이 다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 정당, 사회적 다수,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집단의 일반적 의지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개인’이다. 그는 국민이지만 국민이라는 집합적 정체성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사회의 다수 의견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존재다.
특정 정당의 지지자이면서도 그 정당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존재, 학계의 구성원이면서도 통설과 다른 가설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 그는 언론의 보도와 국가 기관의 설명을 의심하고 독자적으로 검증할 수도 있다.
자유로운 개인은 집단에 속하지 않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여러 집단에 속하면서도 그 어느 집단에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존재다. 바로 이 환원 불가능성이 그의 진정한 자유를 이룬다. ‘다른 개인’의 존재에는 반드시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어떤 개인이 마음속으로만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정치적·사회적 의미에서 ‘다른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차이를 말하고, 기록하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과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표현될 수 없는 차이는 침묵 속에 갇힌 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는 곧 ‘다른 개인’으로 존립할 수 있는 자유다. ‘표현의 자유’란 내가 말할 자유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게 말할 자유다.
자유로운 사회란 모두가 옳은 말을 하는 사회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오류를 반박하며, 사실을 검증하고, 견해를 수정할 수 있는 사회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한 진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라, 진실을 둘러싼 공개적 탐구가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다.
개정 정보통신망법은,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국가에 대해 자유로운 개인들이 획득했던 자유를 회수하려는 기도다. 그럼으로써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위계적으로 억압하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의 의지대로 이 사회를 ‘국가사회화’하려는 시도다. 그 다종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방법적 시도인 것이다.
한국적 명예혁명의 성공을 위해
그네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12·3 이전의 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풍요로운 ‘표현의 자유’를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 구가할 수 없는 자유를 경험한 공화주의자들이다.
이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네’들이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권력을 찬탈하고 반대자를 공격하고 억압할 수 있는 중요한 현실적 근거였다. 넘치는 자유로 인해 자유는 무너질 수조차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는 자유의 가치를 알고 부당한 전체주의 권력으로부터 ‘다른 개인’들이 지켜져야 함을 아는 이들이 아직 너무 많다. 특히 청년들은 한국 사회의 국가-사회-개인의 ‘자유로운’ 관계 방식에 너무나 익숙한 존재들이다.
이들에게 감시와 억압, 처벌은 자유로운 사회를 향한 진짜 ‘싸움’의 근거가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할 때 필자는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 “무섭노”를 둘러싼 논란, 청년들의 야유, 비판, 문제를 야기한 정치인의 허무한 후퇴는 그 하나의 징표다. 자유를 아는 이들의 의지와 비판력은 그렇게나 여유로운 힘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난 6·3 이후 산채 정권은 바야흐로 결정적인 몰락선을 타고 있다. 과연 국민들의 전면적 재선거 요구에서 몸을 뺄 묘안이, 음모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런 희한한 수를 마련할 수도 있기는 있겠는가.)
탄핵 서명 50만 명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이 분노의 힘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불어닥칠 2020년 미국 대선 문제의 파고는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 때맞춘 경제정책의 파탄은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요인을 살펴볼 때 우리의 혁명, 곧 명예혁명의 성공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압도적인,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힘 때문에 이 혁명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와 이란이 다른 이유이다.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