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데이트] “민경욱 前의원, 안면부 뇌출혈 의심 소견”… 15일 주치의 지정 후 수술 검토
부정선거 강연을 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민경욱 전 미래통합당(옛 국민의힘) 의원이 주치의가 지정되는 대로 수술 여부를 최종 결정할 전망이다. 민 전 의원 측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지난 14일 민 전 의원의 뇌졸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컴퓨터단층촬영(CT) 등 긴급 정밀검사를 진행했다. 이후 민 전 의원은 응급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해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라면 한 그릇에는 식량난, 미국 원조 밀가루, 산업화, 야간노동, 입시 경쟁, 텔레비전 광고, 식품 파동, 인터넷 동영상까지 한국 현대사의 여러 모습이 들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 라면의 역사는 음식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식량난, 미국 원조 밀가루, 산업화, 야간노동, 입시 경쟁, 텔레비전 광고, 식품 파동, 인터넷 동영상까지 한국 현대사의 여러 모습이 라면 한 봉지 안에 들어 있다.
1. 라면 이전의 한국— 쌀은 부족하고 밀가루는 남고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먹고사는 일이었다. 쌀 생산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고, 해마다 봄이면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정부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를 소비하면서 쌀을 아끼기 위해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뚜껑을 열어 쌀밥만 싸 온 학생을 검사하기도 했다. 음식점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에 쌀밥 대신 국수·빵 같은 밀가루 음식을 팔도록 하는 ‘분식의 날’도 있었다. 1965년 국민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은 13.8㎏이었으나 1969년에는 28.7㎏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라면은 바로 이 밀가루 시대에 등장했다.
2. 1963년, 한국 최초의 라면이 나오다
1963년 9월 15일, 삼양식품이 한국 최초의 즉석라면인 삼양라면을 내놓았다. 창업자 전중윤은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서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로 만든 이른바 ‘꿀꿀이죽’을 먹는 모습을 보고 값싸고 배부른 식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삼양식품이 지난해 말 소기름, ‘우지’로 만든 라면을 36년 만에 다시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그가 주목한 것이 일본에서 이미 판매되던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전중윤은 일본 묘조식품에서 기계와 제조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생산했다. 최초 제품은 100g 한 봉지에 1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보다 저렴했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아직 낯선 음식이었다. 포장에도 한자와 일본식 표기가 많이 남아 있었고, 국물은 지금처럼 맵기보다 닭고기 육수를 바탕으로 한 비교적 순한 맛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꼬불꼬불한 마른 면을 보며 “이걸 어떻게 먹느냐”고 물었다. 라면을 옷감이나 실의 한 종류로 오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회사 직원들은 시장에서 직접 냄비를 걸고 라면을 끓여 무료로 맛보게 했다. 먹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했던 셈이다.
3. 박정희가 “조금 더 맵게” 주문했다?
삼양라면 초창기 일화 가운데 유명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식 이야기다. 박 대통령이 라면을 먹어본 뒤 “우리 국민은 고춧가루를 좋아하니 조금 더 맵게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후 국물에 고춧가루 맛이 더해지면서 한국 라면은 일본 라면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일화의 내용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 라면이 점차 붉고 얼큰한 국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본 즉석면이 간장·된장·돼지뼈 육수 등으로 다양해진 반면, 한국에서는 고추·마늘·파가 들어간 매운 국물형 라면이 중심이 되었다. 훗날 세계인이 ‘한국 라면’ 하면 매운맛부터 떠올리게 된 출발이었다.
4. 정부가 밀어주고 노동자와 학생이 키웠다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은 라면에 뜻밖의 순풍이 되었다. 쌀밥을 아껴야 한다는 캠페인이 이어지면서 밀가루로 만든 라면은 국가가 장려하는 대체식품이 되었다. 국가기록원에는 1968년 삼양라면 360만 봉지를 베트남에 수출하기로 한 계약식과 1972년 공장 생산 모습도 남아 있다.
산업화도 라면 소비를 늘렸다. 도시의 공장 노동자, 건설 현장 근로자, 자취생에게 라면은 특별한 조리 시설 없이도 먹을 수 있는 따뜻한 한 끼였다. 공장 기숙사에서는 야간작업을 마친 노동자들이 라면을 끓였고, 대학가 하숙방에서는 학생들이 냄비 하나에 라면 여러 개를 넣어 나누어 먹었다.
라면은 점차 ‘배고플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에서 ‘일부러 찾아 먹는 음식’으로 변했다. 달걀 하나를 넣으면 영양식이 되었고, 김치를 곁들이면 훌륭한 한 끼가 되었다. 남은 밥까지 말아 먹으면 냄비 바닥에는 국물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5. 농심의 등장— 닭고기 국물에서 소고기 국물로
1965년 롯데공업으로 출발한 농심은 후발주자였다. 이미 삼양식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같은 맛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농심은 당시 흔하던 닭고기 육수 대신 한국인이 설렁탕과 쇠고기국에서 익숙하게 느끼는 소고기 육수를 내세웠다.
1970년에는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자장면을 출시하며 국물 없는 라면 시장에도 도전했다. 이후 농심은 짜장, 우동, 탕면, 매운 라면을 차례로 내놓으며 라면을 하나의 음식군으로 확장했다.
6. 1980년대, 라면의 전성시대
1980년대는 오늘날 익숙한 라면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시기다.
1982년 너구리가 나왔다. 굵은 면발과 다시마가 들어간 우동형 라면이었다. 봉지를 열었는데 검은 다시마 조각이 나오자 이물질로 알고 회사에 항의한 소비자도 있었다고 한다.
1983년 안성탕면이 등장했다. 된장과 장국 계열의 구수한 맛을 앞세웠다. 1984년 짜파게티가 출시되었다. 중국식 짜장면을 집에서 간편하게 먹도록 만든 제품으로, 일요일 점심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986년 신라면이 나왔다. 포장지에는 매울 신(辛) 자가 큼직하게 적혔다.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매운 라면이었다. 광고에서는 건장한 남자가 라면을 먹다가 땀과 눈물을 흘렸다.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문구도 여기서 나왔다. 신라면은 1991년 무렵 안성탕면을 제치고 시장 선두에 올라선 뒤 한국 매운 라면의 대표가 되었다.
이 시기 라면은 더 이상 가난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등산객은 산 정상에서 버너로 라면을 끓였고, 피서객은 해변 민박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군대 PX와 대학 MT, 야간자율학습 뒤 분식집에서도 라면이 빠지지 않았다.
7. 1989년 우지 파동— 라면 시장을 바꾼 사건
1989년 11월, 검찰은 일부 업체가 라면을 튀기는 데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이를 ‘공업용 쇠기름 라면’으로 크게 보도했다. 소비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삼양식품 제품은 매장에서 회수되거나 외면받았다.
그러나 쟁점이 된 우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폐유라기보다 미국의 분류·통관 방식과 국내 식품 기준이 충돌하면서 생긴 문제였다. 긴 재판 끝에 1997년 대법원에서 관련 업체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압도적인 선두였던 삼양식품은 신뢰와 판매망을 잃었고, 농심이 시장 1위를 굳혔다. 법정에서는 무죄가 나왔지만 소비자의 기억 속 판결은 너무 늦었다.
우지 파동은 한국 식품산업에서 언론 보도, 과학적 검증, 소비자 불안이 얼마나 큰 경제적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8. 라면은 한 봉지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라면은 입맛과 생활방식에 따라 세분되었다. 얼큰한 국물라면, 순한 라면, 짜장라면, 비빔면, 우동형 라면, 해물라면, 사골라면이 경쟁했다. 오뚜기의 진라면은 매운맛과 순한맛을 나누어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을 고르게 했다.
컵라면도 생활을 바꾸었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편의점, 휴게소, 사무실, 열차 안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새벽 편의점 앞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는 모습은 1990년대 이후 도시 생활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한국인은 제품을 그대로 먹는 데 그치지 않았다. 치즈, 만두, 떡, 콩나물, 참치, 햄을 넣었고, 두 종류의 라면을 섞어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짜파구리’는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여기에 고급 쇠고기를 넣어 빈부격차를 표현하는 음식으로 활용되었다.
9. 2012년 불닭볶음면— 국물까지 없애버린 매운맛
2012년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을 출시했다. 국물을 먹는 라면이 아니라 삶은 면에 매우 매운 소스를 비벼 먹는 제품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매워서 누가 사 먹겠느냐”는 반응도 있었다. 초기 제품의 매운맛은 스코빌지수 4,404SHU 수준이었다.
뜻밖의 반전은 해외 인터넷에서 일어났다. 외국인들이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겨루는 ‘파이어 누들 챌린지’ 영상을 올렸다. 참가자들은 얼굴이 붉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영상을 끝까지 찍었다. 매운맛이 약점이 아니라 놀이와 도전의 소재가 된 것이다.
이후 치즈불닭, 까르보불닭 등 매운맛을 부드럽게 변형한 제품이 나오면서 불닭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출발했던 한국 라면 회사가 반세기 뒤에는 세계인에게 한국식 매운맛을 가르치게 된 셈이다.
10. 2025년, 라면은 15억 달러 수출상품이 되었다
2025년 한국 라면 수출액은 전년보다 21.9% 늘어난 약 15억2천만 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주요 시장은 중국 3억8,540만 달러, 미국 2억5,470만 달러, 아세안 2억2,320만 달러였으며 일본·중앙아시아·중동에서도 판매가 증가했다.
오늘날 해외 소비자에게 한국 라면은 싸게 배를 채우는 비상식량이 아니다. 강렬한 맛, 독특한 조리법, 한국 드라마와 영화 속 생활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상품이다. 일본의 라멘이 식당에서 먹는 요리로 세계화되었다면, 한국 라면은 봉지와 컵에 담긴 가공식품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세계화되었다.
한국 라면은 가난 때문에 태어났다. 정부의 혼·분식정책을 타고 성장했고, 공장 노동자와 자취생의 끼니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국민 음식이 되었다. 식품 파동으로 기업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했고, 인터넷 동영상 덕분에 세계인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
1963년 시장에서 시식 방법까지 가르쳐야 했던 낯선 음식이 60여 년 뒤 세계 각국의 슈퍼마켓 진열대를 차지했다. 한국 라면의 역사는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받아들인 외래 식품을 한국인이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고, 다시 세계에 수출한 역사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