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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松山] ‘문학의 세계와 사상’ ⑲어제의 상식은 왜 오늘의 망상이 되는가
  • 松山 작가
  • 등록 2026-07-14 01: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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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에서 상식으로… 논쟁이 끝났을 때

돈키호테(왼쪽)는 이미 시대가 버린 기사도의 상식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간다. 

사상은 언제나 논쟁 속에서 태어난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의 질서를 흔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의심과 비판을 받는다. 그것이 철학이든 정치이념이든 종교이든 예술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한때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생각이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주장하지도 않고 변호하지도 않는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사상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사회의 상식이 된다.

 

상식은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법률처럼 책에 적혀 있지도 않고, 명령처럼 누군가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따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논리를 제시하기보다 “원래 그런 것 아닌가”라고 답한다. 

 

상식은 설명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고 믿는 상태이다.

 

문학은 이러한 변화를 시대마다 가장 먼저 기록한 예술이었다. 한 시대의 소설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믿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상식이다.

 

고대 서사시를 읽으면 왕과 귀족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 문학에서는 신의 질서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근대소설에 이르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중요해지고, 현대문학에서는 개인의 내면과 감정이 가장 중요한 가치처럼 다루어진다. 문학의 주인공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가 달라진 것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바로 이러한 전환기의 작품이다. 돈키호테는 이미 시대가 버린 기사도의 상식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간다. 세상은 현실로 움직이는데 그는 오래된 가치 속에서 살아간다. 독자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지만, 세르반테스가 던진 질문은 훨씬 깊다. 

 

어제의 상식은 왜 오늘의 망상이 되는가. 


시대가 바뀌면 상식도 함께 바뀐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누구보다 먼저 보여주었다.

 

반대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는 새로운 상식이 태어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재산과 신분이 결혼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작품은 인간의 품성과 사랑을 중심에 놓는다. 

 

오늘날 독자는 그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시선이었다. 문학은 아직 사회의 상식이 되지 않은 생각을 먼저 독자에게 경험하게 만든 것이다.

 

위대한 문학은 미래의 상식을 미리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죄인을 단순히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 가난과 사회제도, 인간의 존엄을 함께 바라본다. 당시에는 혁신적인 시선이었지만, 오늘날 복지와 인권을 논의할 때 이러한 관점은 상당 부분 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문학은 법보다 먼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상식이 되었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역사는 잘못된 상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랫동안 노예제도는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에게 교육이 필요 없다는 생각도 상식이었다. 신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믿음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 시대 사람들은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 외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바로 그 상상력을 제공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허크는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을 돕는 것이 죄라고 배운다. 당시 사회의 상식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지옥에 가더라도 짐을 돕겠다”고 결심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우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의 상식보다 자신의 양심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학은 이렇게 상식을 넘어서는 용기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상식을 흔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왜 기소되었는지도 모른 채 재판을 받는다. 아무도 그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는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태도에 더 큰 공포를 느낀다. 

 

부당한 제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무서운 것이다. 카프카는 상식이 얼마나 쉽게 인간의 자유를 마비시킬 수 있는지를 문학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은 시대의 상식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것을 시험한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저 시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질문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지금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 가운데 미래에는 낯설게 보일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 질문 때문에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다. 좋은 작품은 유행이 지난 사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새로운 상식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 일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의심하는 일이 된다.

 

상식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준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공동체는 공통의 기준 위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너무 익숙한 것은 질문하지 않게 된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사고하지 않는 것이고, 사고하지 않는 것은 결국 누군가 만들어 놓은 전제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문학은 그 침묵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며 다른 시대를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시대를 낯설게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던 독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당연하게 믿고 있던 전제를 돌아보게 된다. 문학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있던 질문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 놓는다.

 

사상은 논쟁 속에서 태어나고, 상식은 반복 속에서 굳어진다. 그러나 문학은 그 굳어진 상식을 다시 흔든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고, 설명이 끝났다고 여겨진 세계에 새로운 물음표를 붙인다. 

 

그래서 문학은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예술인 동시에 오래된 상식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그 질문을 통해서만 자신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으며, 문학은 언제나 그 첫 번째 질문을 던지는 가장 오래된 동반자였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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