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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스님 호국칼럼] 미완의 8·15 광복절
  • 응천스님 대한불교호국종 총무원장
  • 등록 2026-08-13 21: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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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
  •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의 공 기억해야

우리에게 8월15일은 1945년 일제 해방(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날이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8·15광복은 빛을 되찾은 기쁨의 날이었지만, 동시에 참담한 현실과의 투쟁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45년 해방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상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문맹률은 77.8%에 달했고, 국민소득은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의 세계 최빈국이었다. 극심한 좌우 대립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국가의 진로를 잡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광복 전후 한국 덮친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 

보건과 인구 환경 역시 절망적이었다. 1940년대 초와 광복 직후 국민의 평균수명은 전체 평균 약 43.8~44세(남성 42.5세, 여성 45.0세 내외)에 불과했다. 

비록 성인까지 살아남은 이들의 체감 수명은 이보다 높았으나, 높은 영아사망률과 전염병, 극심한 보건 인프라 부족은 당시 민생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은 극단적인 생계 위기를 불러왔다. 해외동포의 귀환과 월남민 유입으로 남한 인구는 1944년 약 1588만 명에서 1946년 약 1937만 명으로 2년 만에 349만 명(22% 증가)이나 급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으로부터의 비료 공급이 끊기며 남한 내 비료 공급량은 80% 이상 급감했고, 쌀 생산량은 해방 전 1500만 석 수준에서 1000만~1200만 석으로 추락했다. 

여기에 미군정이 1945년 10월 ‘미곡 자유시장제’를 선언하자 매점매석이 횡행하여 단 몇 달 만에 쌀값이 전년 대비 20배 이상 폭등했다. 

그 결과 1946년 상반기 서울 등 주요 도시의 1인당 일일 쌀 배급량은 최소 생계유지 기준(2합, 약 280g)의 절반인 1합 내외(약 140g)로 떨어져 민생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처럼 참담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국민의 민심 또한 크게 흔들렸다. 

1946년 8월13일 미군정청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했고, 자본주의는 14%, 공산주의는 7%(기타·모름 8%)에 그쳤다. 국민 대다수가 사회주의 노선에 기울어 있던 체제 선택의 절체절명 위기였던 셈이다.

이렇듯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확고한 신념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결단한 것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미래를 좌우한 문명사적 선택이었다. 

만약 당시의 시대적 포퓰리즘에 휘둘려 다른 길을 택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역사적 결단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결코 한쪽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분명한 과오가 있었다. 장기집권과 권위주의적 통치, 3·15부정선거 등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며 엄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실제로 그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하야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과오가 있다고 해서 공적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역사는 성인전도 아니고 정치적 신앙고백도 아니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착근시키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61년 7월 ‘고대신문’이 고려대학교 재학생 3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답했다(한배호·김규택, ’한국 대학생의 정치의식 고찰‘ 재인용). 

당대 최고의 지식인층인 대학생들조차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토양과 가능성에 의문을 표할 만큼, 당시의 시대적 토대는 척박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가체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한다면, 그것 역시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의 출발점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의 선택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15일 수립되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야 한다.

왜 대한민국을 세운 지도자를 공과 과를 구분하여 평가하지 못하는가? 왜 이승만의 공적을 말하는 것조차 정치적 진영논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건국대통령’을 두고도, 좌파 세력이 구성한 이념적 프레임에 막혀 그 당위성을 당당히 부르지 못하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역사적 공적을 폄훼하고 국부(國父)로서의 지위를 부정하는 좌파적 사관은, 8·15 광복절이 여전히 이념적 미완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단편적인 지점만을 부각해 예산 형평성을 왜곡하는 행태 역시 심각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시설에는 김대중컨벤션센터(1345억 원), 노벨평화상기념관(200억 원), 김대중도서관(124억 원) 등 지자체와 국비를 포함해 총 3000억 원 이상의 거대한 사회적 자본이 투입되었다. 

반면,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은 민간 모금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약 460억 원 규모의 단일 사업임에도 좌파 진영의 거센 공세에 직면해 있다.

이는 역사적 맥락과 구조를 탈맥락화한 채, 특정 단면만을 자의적으로 소비하는 ‘역사적 키치(Kitsch)’이자 편협한 정파적 담론에 불과하다. 역사를 집단적 진영 논리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러한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양식 있는 지식인 사회가 나서 학술적 성찰과 객관적 담론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광복의 완성은 역사를 이념의 도구로 삼는 편향성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법치적 정통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정직함에서 출발한다.

폭염 속에 울려 퍼진 청년들의 절규

오늘도 폭염이 가라앉지 않은 올림픽공원 한복판,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외치는 청년들의 절규는 법치와 국익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적 경종이다.

헌법정신을 유린한 ‘검수완박’의 폭주, 국가 안보의 보루인 3군 사관학교 통합, 특정 정치인을 구하기 위한 공소 취소 모임은 해외 토픽감이요 소가 웃을 비극이다. 

여기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입조차 막아버리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허위정보 손해배상제)’ 등은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입법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친 듯이 치솟은 집값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은 산산조각 났고, 청년들의 마지막 희망이어야 할 주식시장은 투기판 카지노로 변질되어 청년세대의 미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무너진 헌법정신과 파탄 난 민생을 바로잡아달라 부르짖는 그 고뇌의 현장은, 구조적 왜곡과 사회적 아노미(anomie)에 직면한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재정립하고 민주적 공론장의 회복을 촉구하는 시대의 비판적 성찰이다. 오늘도 그 참담한 현장으로 향하는 필자의 발걸음은, 물에 적신 솜처럼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 응천 스님

대한불교호국종 총무원장 

호국승군단 초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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