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특별기고: 松山] 8·29 경술국치… 나라를 빼앗긴 건가, 망할 나라가 망한 건가?
  • 松山 작가
  • 등록 2026-08-29 22:27:31
기사수정

한일병합을 기념하는 일본제국 엽서.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개인 소장품]

8월29일은 경술국치의 날이다. 1910년 오늘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우리는 이날을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날이라고 배운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고, 대한제국은 이들의 배신 때문에 희생된 불쌍한 나라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아주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정말 몇몇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서 대한제국이 망했을까? 이완용이 도장을 찍지 않았으면 대한제국은 살아남았을까? 송병준과 일진회가 합방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한국 병합을 포기했을까?

백성이 나라 잃고도 동요하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한 것은 1910년 8월29일의 한반도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왜 전국적인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수많은 백성이 서울로 몰려와 황제를 지키겠다고 외치지도 않았다. 전국의 지방관과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본에 맞서지도 않았다. 

합병 이전 의병을 비롯한 무장저항이 존재했고 일본의 강한 진압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가?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도 살펴봐야 한다. 대한제국이라는 정치체제가 이미 상당수 백성에게 지켜야 할 국가로서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은 500년 가까이 왕의 나라였다. 오늘날처럼 국민이 주권을 갖고 정부를 선택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정치의 중심에는 왕과 왕실이 있었고 관료를 선발하는 주요 통로는 과거제였다. 

백성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기보다 통치의 대상이었다. 세금을 냈지만 국가예산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고, 군역을 부담했지만 국가정책을 선택할 투표권도 없었다.

19세기 후반 세계는 이미 전혀 다른 정치 질서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봉건적 번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만들었다. 

1889년에는 메이지헌법을 공포했고 1890년에는 제국의회를 열었다. 제한적인 선거권과 강한 천황주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적 헌법과 의회, 정당정치라는 장치가 등장했다. 관료제와 군대도 중앙정부 아래 재편됐다.

그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충돌했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이 이어졌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에는 외국 세력까지 동원됐다. 어느 나라의 힘을 빌려 다른 세력을 견제할 것인가가 국내정치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1910년 사라진 대한제국의 정체성은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나라 이름을 제국으로 바꾸고 국왕이 황제가 되었다고 근대국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체제의 중심은 여전히 황제권이었다.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이 ‘전제정치’를 하는 나라임을 명시했고 황제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 경술국치의 정치적 역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제국의 주권 상실을 국민주권의 상실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1910년에 사라진 대한제국 자체가 국민주권국가는 아니었다. 

국민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던 나라도 아니었고, 정권교체를 선거로 결정하던 나라도 아니었다. 황제가 통치권의 중심에 있었고 백성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시 평범한 농민에게 ‘대한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통치하던 왕조와 황실을 지키는 일이었을까? 오늘날 민주공화국 국민의 애국심을 그대로 1910년 사람들에게 투영하면 이 차이가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송병준과 일진회를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 확대에 협력하고 합방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런 정치노선을 선택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그들의 논리에는 대한제국이라는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왕실과 관료집단이 스스로 국가를 개혁하기 어렵고 독립을 유지해봤자 기존 권력구조가 계속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반면 일본은 이미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만들고 헌법과 의회, 정당, 근대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정치가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선의 전제군주제와 비교하면 정치제도의 형태가 훨씬 근대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일부 조선인은 독립된 대한제국의 존속보다 일본제국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 정치와 사회의 낡은 구조를 깨뜨리는 더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친일파가 실제로 옳았다는 뜻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런 선택지가 당시 조선인 사이에서 현실적인 정치노선으로 등장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몇몇 악당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설명보다 더 뼈아픈 해석이 가능하다. 대한제국이라는 정치체제 자체가 내부 구성원 가운데 일부에게 미래를 걸 만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 합병과 함께 조선왕조에서 이어진 정치질서는 사실상 완전히 끝났다. 황제는 더 이상 통치자가 아니었다. 양반도 법적인 정치적 특권계급으로 복원되지 않았다. 과거제를 통해 관료가 되는 세계 역시 이미 사라졌다. 그 자리에 총독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근대적 관료체제가 들어왔다.

물론 이것을 민주화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이 선거를 통해 구성한 정부가 아니었으며 총독은 조선인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특히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제도를 중심으로 강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한제국에서 식민지 조선으로의 변화는 전제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의 발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사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왕 개인과 궁정이 중심이었던 정치에서 법령과 관료조직, 통계와 문서를 중심으로 영토 전체를 관리하는 행정국가로 이동했다. 사람의 신분보다 행정상의 자격과 직업이 중요해졌고 국가권력은 지방사회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총독부는 무단통치의 일부 방식을 수정했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조선인 언론과 사회단체의 활동공간이 제한적으로 넓어졌다. 지방제도에서도 제한적이나마 조선인이 참여하는 장치가 만들어졌다. 

물론 일본 본토와 동일한 정치적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는 제국의회 의원을 선출할 보통의 참정권이 없었고 총독부의 최고권력은 조선인의 선거로 통제되지 않았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식민지기의 정치적 근대화를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행정은 근대화됐지만 주권은 없었다. 관료제는 확대됐지만 민주적 책임정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인 법과 행정기관은 들어왔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최고권력을 조선인이 선거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식민지기의 변화 속에서 성장한 조선인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신문을 읽고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도시에서 조직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정치단체와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근대적 국민의식과 대중정치가 성장했다. 

3·1운동 역시 조선왕조를 복원하자는 운동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이후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공화주의가 강력한 정치적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이 점은 중요하다. 1910년에 사라진 나라는 왕조에서 이어진 대한제국이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고종의 후손을 다시 황제로 세우자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양반제를 되살리지 않았고 황제주권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왕조의 혈통이 아니라 국민에게서 찾는 전혀 다른 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정치사의 긴 흐름에서 1910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단지 일본이 멀쩡한 근대국가 하나를 없애버린 날이라고만 설명하면 충분할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1910년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사라진 국치의 날이면서 조선왕조에서 이어진 정치체제가 역사에서 퇴장한 분기점이기도 했다. 

그 뒤 한반도는 식민지 관료국가라는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경험했고, 그 안에서 다시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근대 정치사상이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아름다운 직선이 아니었다. 식민통치에는 강제와 차별이 있었고 조선인에게 완전한 참정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 불편하다고 중간의 35년을 통째로 잘라낼 수는 없다. 조선왕조에서 곧바로 대한민국이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송병준 문제로 돌아가 보자. 송병준의 정치적 선택을 평가하려면 ‘나라를 팔았다’는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나라를 버리고 어떤 체제를 선택하려 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가 포기한 대한제국은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선택한 일본제국이 조선인에게 민주적 자기통치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다. 송병준의 선택은 하나의 전근대적 정치질서를 버리고 근대적이지만 식민지적인 제국체제에 편입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친일과 매국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독립은 언제나 좋은 것이고 합방은 언제나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만으로는 당시 사람들이 마주한 선택의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정치에서 독립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역시 중요하다. 부패하고 무능한 독립국가가 자동으로 좋은 정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근대적 행정체제를 가진 제국이 피지배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경술국치에서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도 바로 국가의 능력이다. 왜 대한제국은 자기 주권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국가를 만들지 못했을까? 왜 왕실을 넘어 국민의 정치적 충성을 끌어낼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지 못했을까? 왜 청과 러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외교에 의존하면서 독립을 뒷받침할 군사력과 재정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을까?

그 질문을 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넘기는 것은 오히려 편하다. 악당 몇 명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면 국가 전체의 실패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국가는 몇 사람의 배신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국민이 국가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정치제도가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정부가 안정적인 재정과 군사력과 행정력을 갖추고 있다면 외부세력이 몇몇 정치인을 포섭했다고 해서 나라 전체를 삼키기는 어렵다.

대한제국에는 그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1910년 8월29일의 조용함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상당한 무장저항이 진압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조에서 이어진 국가와 백성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문제일 수도 있다.

경술국치를 맞아 필자는 다시 묻는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만 찾으면 대한제국이 왜 망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송병준을 부관참시하고 이완용에게 백 년을 더 욕한다고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가 더 나은 정치가 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매국노 몇 명인가, 아니면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까지 잃어버린 국가인가?

1910년 대한제국은 주권을 잃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정치적 상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왕조에서 이어진 전제군주적 정치질서도 역사에서 퇴장했다.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관료국가였다. 

그리고 그 식민지 경험을 통과한 뒤 한반도에서는 왕의 나라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주권자로 삼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정치가 성장했다.

그 긴 정치사의 끝에서 1948년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경술국치의 교훈은 그래서 ‘일본을 미워하자’는 한마디로 끝날 수 없다. 어떤 나라도 스스로를 지킬 정치적 능력을 잃으면 주권을 잃을 수 있다. 

그리고 국민에게 자기 나라라고 믿게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위기가 닥쳤을 때 생각보다 훨씬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8월29일에 필자가 다시 읽는 경술국치의 가장 불편한 교훈이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사 칼럼니스트이자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와 철학포럼 리케이온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자유주의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시집 ‘하다못해 가슴에라도’외 3권이 있으며 공역 ‘후크고지의 영웅들’과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 ‘문학의 세계와 사상’이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슬퍼요
0
화나요
0
정기구독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