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감광재(포토레지스트) 하나가 중국의 130조 원을 세상에서 제일 비싼 휴지로 만들고 있다. [그래픽=로이터·연합뉴스]
오늘날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을 넘어 국가의 명운을 결정짓는 전략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국 반도체 굴기의 출발점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었다.
2010년대 초반, 중국은 매년 기름을 사 오는 돈보다 반도체를 수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써야 했다. 반도체 자급률이 10% 안팎에 머물다 보니,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같은 핵심 산업의 칩을 몽땅 외국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시진핑정부는 이를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에너지, 식량, 군사 체계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봤다. 언제든 상대에게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중국은 반도체를 국가 생존이 걸린 안보 자산으로 격상하고 총력전을 선언했다.
중국 정부의 총력전… ‘돈으로 시간을 산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는 발상 아래, 중국은 지난 10년간 전례 없는 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2014년 ‘국가 반도체 산업 발전 추진 지침’과 함께 ‘빅펀드(대기금)’를 조성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1차부터 3차까지 투입한 자금만 약 128조 원에 달하며, 지방정부와 은행 대출까지 합치면 전체 투자액은 130조 원을 가볍게 넘어선다. 2015년에는 ‘중국제조 2025’를 발표하며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해외 기업 인수와 기술 흡수에 매진했다.
미국의 제재와 축적되지 않은 기술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미국의 강력한 제재가 시작되면서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이 끊겼고, 첨단 공정의 필수품인 네덜란드 ASML의 노광장비(Lithography System·리소그래피) 수입마저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공장조차 완공하지 못한 채 무너진 ‘우한훙신반도체(HSMC)’의 사례처럼 내부적인 실패도 잇따랐다.
칭화유니(쯔광그룹·紫光集團) 역시 무리한 인수·확장과 과도한 부채로 몰락의 길을 걸었고 창업자인 자오웨이궈(趙偉國) 전 회장에게 사형 및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청두거신(成都格芯)·난징더커마(南京德科码)·지난취안신(济南泉芯)같은 회사들도 막대한 정책 자금을 받고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파산했다.
또한 2022년과 2023년 사이 대기금 핵심 관계자들이 기율 위반과 부패 혐의로 잇따라 조사받은 사실은 중국식 ‘속도전 산업 육성’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반도체 산업은 자금 투입만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설계부터 소재까지 수십 년에 걸친 기술 축적이 필요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미국 제재에 맞서 ‘기술 독립’ 추진

그럼에도 중국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2023년 8월 하나의 상징적 성과를 전면에 내세웠다. 화웨이가 출시한 스마트폰 ‘메이트60’에 중국 파운드리 사 SMIC가 생산한 7나노급 칩이 탑재됐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중국은 이를 ‘미국 제재 돌파’의 증거로 선전했다.
미국의 첨단 장비 수출 통제 속에서도 첨단 공정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대내적으로는 체제의 자신감을 과시하는 도구였고 대외적으로는 제재의 실효성을 흔드는 정치적 카드로 활용됐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압박을 ‘기술 독립’의 기회로 삼아 구형 공정부터 장비와 소재에 이르기까지 국산화에 속도를 높였다. 10년 전의 구호는 이제 미국의 봉쇄에 맞서 자국 중심의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처절한 ‘안보 전쟁’으로 진화했다.
핵심 변수는 ‘포토레지스트’

그러나 이 성과의 이면을 냉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해당 공정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없이 DUV(심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한 다중 노광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비용과 수율에서 극단적으로 불리한 공정이다. EUV 노광장비로 1회에 웨이퍼에 회로를 그릴 것을 DUV 노광장비로는 최소 5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그려야 한다.
공정 단계가 늘어날수록 실패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그만큼 소재 소모량과 공정 비용은 폭증한다.
대만 TSMC의 7나노 공정 수율이 90%이지만 중국 SMIC의 수율을 50%도 미치지 못한다고 업계 관계들은 말한다. 즉, 중국 SMIC의 7나노 공정은 단기적으로는 ‘가능함’을 증명했지만 대량 양산과 안정적 공급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핵심 변수로 부상한 것이 포토레지스트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 위에 형성하는 데 사용되는 감광액으로 나노급 반도체 공정을 좌우하는 필수 소재다.
이 소재가 없으면 공정 자체가 멈춘다. 더 중요한 사실은 포토레지스트가 유통기한이 최대 1년이라 대량 비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매 공정마다 정해진 주기에 맞춰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생산라인은 즉각 차질을 빚는다. 장비는 몇 년을 버틸 수 있어도 소재는 매달, 매주 확보돼야 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벽

그동안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중국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발목을 잡혔다.
2025년 현재,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는 뜻밖에도 일본이 만든 재료 하나 때문에 멈춰 서고 있다. 그 주인공은 최첨단 장비나 엄청난 자본이 아니었다. 바로 반도체를 만드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이다.
글로벌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약 70%를 일본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7나노 이하의 첨단 EUV용 제품의 경우 일본 기업들의 점유율은 95%를 넘는다. 50년 동안 축적된 기술 장벽의 결과다.
특히 △JSR △도쿄오카공업 △신에츠화학 △후지필름 등은 대체 공급처를 찾기 어려운 입지를 구축해 왔다.
이 가운데 JSR은 2023년 일본 정부 산하 투자기관인 JIC에 의해 인수되며 사실상 국유화됐다. 이는 단순한 기업 거래로 보기 어렵다. 반도체 핵심 소재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편입한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025년 하반기, 일본이 대(對)중국 포토레지스트 수출을 비공식적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관측이 확산되자 중국 증시는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수출 금지 조치를 발표한 적이 없고, 관련 기업들 역시 계약상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전면 금지’보다 ‘미세 조정’이 훨씬 강력한 수단

그러나 반도체 소재 공급은 ‘전면 금지’보다 ‘미세 조정’이 훨씬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허가 절차의 지연, 물량 배분의 조정, 품목 분류의 세분화만으로도 첨단 공정은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경험은 중요한 대비를 이룬다.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하자 한국은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플루오린폴리이미드 등에서 심각한 수입 차질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은 동맹국이라는 외교적 지위,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정 경쟁력, 그리고 시장 신뢰를 바탕으로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JSR, 도쿄오카공업 등 일본 기업들은 한국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는 중이며, 한국 기업들은 국산화와 수입국 다변화를 병행하며 구조적 취약성을 줄여 나갔다. 위기는 관리 가능한 범위로 통제됐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중 전략 경쟁의 한복판에서 중국은 미국의 제재망 안에 있으며, 일본 기업들이 중국 내에 첨단 소재 공장을 새로 짓거나 핵심 기술을 이전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반도체 산업은 동맹국 공급망에 좌우되는 전략 산업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순수한 시장 경쟁의 영역이 아니다. 가치와 동맹, 신뢰와 규범이 깊숙이 개입한 전략 산업으로 전환됐다. 이 구조 속에서 자본만으로 모든 고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은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반도체 패권은 투자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기술과 그 기술이 뿌리내린 동맹국의 공급망에 의해 좌우된다.
중국은 돈으로 시간을 사려 했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시간은 돈으로 완전히 대체되지 않는다. 작은 소재 하나가 130조 원의 중국 국가 프로젝트를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은 과장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다.
2025년의 반도체 전쟁은 더 이상 ‘누가 더 많은 공장을 짓느냐’의 경쟁이 아니다. 누가 신뢰를 축적했고, 누가 소재와 고성능 장비를 쥐고 있는가의 문제다.
일본의 소재 산업과 미국의 제재망을 무시한 중국의 130조 원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휴지로 변하고 있다.
한미일보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