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소련과 북한에 줄 대고선 ‘민족’ 독점 [松山 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②]
  • 松山 시인
  • 등록 2026-01-01 06:00:01
기사수정
  • 민족 자주 외치면서 민족 결정권은 소련에 의존
  • ‘민족’ 외치면서 민족의 생명 파괴한 6·25전쟁

주석 자리에 오른 북한 김일성이 1956년 6월 소련을 공식 방문, 모스크바에서 소련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해방 직후 한국 좌파가 범한 두 번째 결정적 오류는, 정치적 생존과 권력 획득의 기반을 외부 권력에 두면서도 동시에 ‘민족’을 독점적으로 말한 태도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 노선의 차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 착오가 아니었다. 언어와 현실, 주장과 조건 사이에 발생한 구조적 불일치였다. 

 

민족을 말했지만 민족의 자율은 말하지 않았고, 해방을 말했지만 해방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외부 후원자인 소련으로 대체되었다. 이 모순은 이후 수십 년간 한국 좌파 담론의 핵심 결함이 되었다.

 

김일성 정치적 권위의 근거는 소련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이후, 한반도 북부는 곧바로 소련군의 군사 점령 하에 들어갔다. 이 점령은 단순한 치안 유지나 질서 회복 수준이 아니었다. 

 

소련군정은 행정·경찰·정보·선전의 핵심을 장악했고 정치 조직의 구성과 지도자의 선발, 정책 방향 설정에 직접 개입했다. 북부 지역에서 형성된 정치 질서는 자생적 정치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점령 권력이 설계한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사이 김일성은 소련의 승인과 보호 속에서 급부상했다. 그의 항일 이력이 선전의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정치적 권위의 실질적 근거는 소련군의 선택과 후원이었다. 

 

대중적 합의, 공개된 경쟁, 제도적 검증의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한의 일부 좌파는 이 명백한 조건을 외면한 채, 이를 ‘국제 연대’ 또는 ‘반제국주의 진영의 협력’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문제는 연대 그 자체가 아니라 연대의 방향과 그에 따른 정치적 비용이었다.

 

민족 자주를 주장하면서 정작 민족의 정치적 결정권을 외부 강대국 소련의 승인에 의존하는 태도는 자기모순이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성과 토지개혁 과정 역시 소련군정의 관리와 통제 아래 진행됐다. 문제는 토지개혁이라는 정책 자체가 아니라 집행 방식과 정치적 환경이었다. 

 

반대 의견은 제도적으로 배제되었고 다른 노선의 좌파나 비공산 진영의 정치 세력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다. 북한에서는 다원적 정치 경쟁이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민족’ 뒤로 밀려나

 

이런 조건을 외면한 채 “북은 민족의 편, 남은 외세의 편”이라는 구호를 반복한 것은, 사실에 대한 무지이거나 의도적 은폐였다. 남한 역시 미군정 하에 있었지만 북과 남의 차이는 외세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외세 아래에서 허용된 정치적 공간의 성격이었다. 

 

1950년 4월10일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찾은 김일성에게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이 차이를 지우고 민족 대 외세라는 이분법으로 모든 현실을 단순화한 결과, 민족은 분석의 개념이 아니라 선동의 언어로 전락했다.

 

남한 좌파의 언어에서 ‘민족’은 점차 도덕적 면허증이 되었다. 민족을 말하면 검증은 유예되었고 민족을 외치면 권력의 성격은 묻지 않았다. 정책의 결과, 권력의 책임,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민족이라는 말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외부 의존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될 수 없다. 소련의 군사·정치적 후원을 받는 체제는, 그 자체로 민족의 자율적 결정에서 멀어진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이후 종북 담론의 핵심 습관이 되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은 이 위선을 제도화한 사건이었다. 국가 수립이라는 형식은 갖추었지만, 권력 교체의 절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거는 경쟁이 아니라 인증에 불과했고,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반대파의 존재는 체제의 외부로 아예 밀려났다. 그럼에도 남한의 일부 좌파는 이를 “민족국가의 탄생”으로 찬양했다. 민족을 말하며, 국민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을 민족의 이름으로 옹호한 셈이었다.

 

‘민족’ 외치면서 민족의 생명과 재산 파괴

 

이러한 이중 기준은 6·25전쟁을 거치며 더욱 노골화되었다. 전쟁은 국가와 국민에게 최악의 비극이었다. 수백만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고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남한 좌파는 전쟁의 책임을 흐리거나, 모든 원인을 외부 제국주의의 충돌로 돌렸다. 민족을 말하면서도,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파괴한 폭력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 순간 민족이라는 말은 인간의 고통을 가리는 위장막이 되었다.

 

이 위선의 결과는 장기적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민족’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차단의 장치로 작용했다. 

 

북한과 소련, 이후 중국과의 구조적 의존 관계를 지적하면 ‘분열 조장’으로 낙인찍혔고, 외부 권력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민족 반역’으로 몰렸다. 민족을 말하는 쪽이 오히려 민족의 선택권을 축소시키는 역설이 반복되었다.

 

민족은 외부 권력과의 줄서기로 지켜지지 않는다. 민족은 시민의 자유, 권력의 책임, 공개된 검증과 비판 속에서만 유지된다. 

 

해방 직후 소련과 북한에 정치적 운명을 걸어 놓고 민족을 외친 선택은, 민족을 수단으로 삼아 이념을 보호한 위선이었다. 

 

이 위선을 깨지 못한다면 종북 좌파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충돌의 대가는 언제나 좌파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치르게 된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유니세프-기본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