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Ⅱ부. 불신은 어떻게 확산되고 고착되는가 (6~10편)
⑥ 언론, 불신을 설명하지 못한 중재자
⑦ 정치, 선택 없는 말의 정치
⑧ 경제, 숫자는 많아졌는데 신뢰는 사라졌다
⑨ 교육,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할 제도의 붕괴
⑩ 노동, 보호가 아니라 위험이 된 제도
언론 불신은 흔히 ‘신뢰의 문제’로 설명된다. 편향, 선정성, 오보 같은 단어들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오늘의 현상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언론 불신은 신뢰의 상실이기보다 기능의 상실에 가깝다.
언론의 핵심 기능은 설득이 아니다. 판단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과 이해관계 사이에서 사실을 정리하고, 해석의 경계를 명확히 하며, 판단의 근거를 기록하는 중재자 역할이다.
이 기능이 약화될 때, 언론은 신뢰를 잃기 이전에 먼저 역할을 잃는다.
문제는 사실의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은 넘쳐난다. 속보와 데이터, 발언 인용과 분석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이 정보들은 독자가 판단에 필요한 형태로 정렬되어 있지 않다.
사실과 해석, 의견이 한 문단 안에서 뒤섞이고, 무엇이 확인된 내용이며 무엇이 평가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이 혼합 구조는 의도적 조작의 결과라기보다 환경의 산물이다.
속도 경쟁, 클릭 압박, 플랫폼 유통 구조 속에서 언론은 설명보다 전달을, 기록보다 반응을 우선하게 됐다.
그 결과 언론은 판단의 근거를 남기기보다, 판단을 촉발하는 자극을 제공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확증편향 사회에서 이 변화는 치명적이다.
독자는 이미 형성된 인식을 확인해 주는 정보만을 선택한다. 언론이 사실을 구조화해 제시하기보다 각 진영의 해석을 병렬로 나열할 때, 독자는 더 쉽게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고른다.
이때 언론은 중재자가 아니라 확증의 재료 창고가 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책임도 희석된다.
“사실을 보도했을 뿐”이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실을 선택했고, 어떤 맥락을 생략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판단의 경로가 남지 않으면, 언론 역시 설명 책임을 지기 어려운 구조로 들어간다.
언론 불신이 깊어질수록, 독자는 언론을 믿지 않기보다 언론을 활용한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비한다. 이때 언론은 공론장의 중심이 아니라, 각자의 확신을 강화하는 주변 장치로 전락한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변화가 언론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론은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 왔다. 그러나 그 적응의 방향은 중재 기능의 약화였다.
설득의 언어는 늘었지만, 기록의 언어는 줄어들었다.
불신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다시 정의돼야 한다.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기능의 복원이다.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해석인지, 무엇이 아직 불확실한지를 분리해 판단의 재료를 구조화해 남기는 일이다.
언론이 판단을 대신하려 할수록 불신은 커진다.
반대로 판단을 독자에게 돌려주고, 그 판단이 가능하도록 기록을 남길 때, 언론은 다시 중재자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언론 불신은 신뢰의 상실이 아니라 기능의 상실이다.
중재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언론은 판단을 돕지 못한다.
다음 편(⑦ 정치, 선택 없는 말의 정치)에서는 언론을 넘어, 선택 없는 말의 정치가 어떻게 책임을 사라지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