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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3·1 독립선언서 바른 표기와 낭독으로 독립정신 고양하자
  • 박동규 전 영북고 교장
  • 등록 2026-03-01 0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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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탑골공원 내 독립선언서 기념물. Ⓒ한미일보 

1. 헌법 전문, 3·1독립선언서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유구(悠久)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표기돼 있다.

 

이에 3·1독립선언서는 헌법 위에 있는 민족의 최상위의 헌장(憲章)이다. 세계인에게는 ‘세계인권선언서’가 있다면, 우리 국민에게는 ‘3·1독립선언서’라는 금과옥조의 장전(章典)이 있는 것이다.

 

2. 상해 임시 정부 수립, 민주공화제 정부의 삼권분립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11일,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같은 해 9월 임시 헌법을 공포, 11월에 이승만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를 선출했다.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삼권분립으로 입법기관의 의정원(議政院),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기관의 국무원(國務院)을 구성했으며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3.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러한 사조에 호응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민족의 독립 의지가 고조됐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조선청년독립단이 중심이 되어 춘원 이광수가 초안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 발표가 기폭제가 되어 1919년 3월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3·1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해가 기미년(己未年)이기에 기미독립선언서로 통칭하고, 선언서·선언문 등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내 팔각정. Ⓒ한미일보 

4. 3월1일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탑골공원 시위

 

 1919년 3월1일 당일 12시에 태화관에서는 민족 대표가 모여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2시 탑골공원 팔각정에서는 학생과 시민 1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치세 정지용의 선언서 낭독으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고, 시가행진과 함께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5. 3·1독립 운동, 독립선언서의 문장 구성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1일을 기해서 일본침략에 항거하여 2000만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의 거사였다. 

 

전 조선 민족에게 보낸 선언문 문장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장엄하고 웅변적으로 서술되었으며, 기(起)·승(承)·전(轉)·결(結) 4단계로 구성됐다.

 

6. 3·1독립선언서 및 공약 3장의 작성

 

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고, 공약(公約) 3장은 행동강령으로 만해 한용운이 추기(追記)했으며, 서명 일자를 공란으로 둔 것은 거사일을 미리 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종교별 대표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총 33명이며, 민족 대표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내 의암 손병희 동상. Ⓒ한미일보 

7. 선언서의 요지, 수사법에 따라 선언문의 문장 구성

 

선언서의 요지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그 선언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밝힘으로써 우리 민족의 굳은 결의와 각오를 촉구하는 것이다. 

 

문장은 논리적이면서도 강한 의지를 담아 대중을 선동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영탄·대구·열거·점층·비교 등 다양한 수사법이 활용됐다.

 

8. 선언서의 문체, 선언서의 인쇄 및 배포

 

선언서의 문체는 한문을 중심으로 하되 국문을 함께 사용한 국·한문 혼용체로, 전체 분량은 총 1760자이며 이 중 62%가 한자로 이루어진 강건체 문장이다. 

 

선언서는 1919년 2월27일 보성사에서 2만1000부가 인쇄되었고, 다음 날인 2월28일에 배포되었다. 3월1일에는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1500부가 전달되었으며, 나머지 인쇄물은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9. 탑골공원의 선언서비 오기 제기, 선언서 모사판의 건립

 

민족의 성지 탑골공원에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을 비롯해, 동편에 세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대형 선언서비, 왼쪽에는 영역(英譯) 서언서비, 오른 쪽에는 국역(國譯) 선언서비가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중앙의 큰 선언비에서 오류 한자 6자와 북위체(北魏體)로 표기된 한자 250여 자로를 발견해, 새로운 원본선언서비 건립을 대통령과 국가보훈처, 종로구청 등에 국민 제안으로 요청한 바 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2015년 6월7일, 관할 종로구청이 원본 선언서의 4배 크기로 제작한 ‘원본선언서 모사판(模寫板)’을 세워 탑골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최초의 선언서 원문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모사판은 현재 문화재청이 사적 제 354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팔각정에서는 학생과 시민 1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치세 정지용의 선언서 낭독으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미일보 

10. 독립선언서의 보성판·신문판의 식별

 

3·1독립선언서는 보성사(普成社) 판과 신문관(新文館) 판으로 구분된다. 보성사판은 3·1독립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원본 선언서에 해당한다. 


반면 신문관 판은 8·15광복 후에 대량으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본과는 일부 표기에서 차이가 있다. 두 판본의 구분은 국어 맞춤법과 한자 표기의 차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성사판 원본선언서는 등록문화재 제664-1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실제로 배포된 선언서는 매우 드물게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는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던 휘문의숙 4학년생 월탄 박종화의 후손이 보관해 온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 평양에서 일본인이 보관했던 선언서를 그 손자가 전해 온 ‘평양본’이다. 


이처럼 극히 소수의 희귀본만이 원본 형태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 전국에 세워진 선언서비나 유통되는 선언문 대부분은 광복 이후 제작된 신문관 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1독립선언서 원본인 보성사판과 오류본인 신문관판의 분석 비교 


영 역 별

보 성 사 판

신 문 관 판

1

문장 서술

1930년대 고어체 

띄어쓰기 하지 않음

주시경 문법 적용

일부 띄어쓰기

2

활자의 크기

크다

작다

3

행수 (줄 수)

62行

47行

4

‘朝鮮’의 표기

鮮朝

朝鮮

5

인쇄 신문사 사장

李鍾一 

崔南善 

서명 일자 

三月 日

三月 一日

7

문장부호 

符號(사용하지 않음)

符號 (마침표 표기)

8

한자 오자의 

표기

 

선언서 9 행 剝喪 (박상)

剝奪 (박탈) 

선언서 12행 宣暢 (선창) 

宣揚 (선양)

선언서 23행 懲辦 (징판) 

懲辨 (징변)

선언서 33행 共倒同兦 (공도동망)

 共倒同亡 (공도동망)

선언서 40행 回穌 (회소) 

回蘇(회소)

선언서 42행 蹰躇 (주저)

躊躇(주저)


11. 3·1독립선언서 서두 鮮朝는 朝鮮 

 

원본선언서 서두의 ‘吾等는 玆에 鮮朝의 獨立國임…’에서 ‘朝鮮’이‘鮮朝’로 앞뒤가 바뀐 것은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의 조판(組版)·인쇄(印刷) 과정에서 오류(誤謬)로 추정된다.

 

12. 3·1독립선언서 한문고어 문장, 기념식 추념식서 국역선언서의 낭독 

 

선언서 1,762자 가운데 약 62%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려운 한자어와 1933년 한글맞춤법 제정 이전의 국어 표기를 따르고 있다. 


특히 ,ㆍㅿ ㆆ ㆁ의 4자는 소멸된 문자들이 사용된 점도 특징이다. 이러한 한문 고어와 국문이 혼용된 긴 문장 구조 때문에, 경축식이나 추념식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한자에 독음(讀音)과 현토(懸吐)를 달아 읽거나, 아예 선언서 전문을 현대 국어로 옮겨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 시민들은 행사에서 이어지는 한자 낭독이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져, 선언서 낭독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도 종종 나타났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국민 누구나 선언서를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자는 일석 이희승의 국역 한글 풀이본 독립선언서를 공식 행사에서 사용하도록 행정안전부·국가보훈처·광복회 등에 청원했다. 

 

그 결과 2012년 3월1일, 제93주년 3·1절 경축식과 추념식부터 국역 선언서 낭독이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필자는 부부와 함께 추념식에 초청되어 참석했으며, 국역 선언서의 도입은 국민이 독립선언의 뜻을 새롭게 이해하고 독립 정신을 더욱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3. 3·1독립선언서는 강희자전 명조체 해서로 표기

 

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부 고시(告示) 제1992-19호(1992년 10월30일) ‘고등학교 한문과 교육과정령(敎育課程令)’에 따라, 중등학교에서 사용하는 한자 표기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바탕을 둔 명조체(明朝體)·해서체(楷書體)를 표준으로 삼도록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적 연속성을 고려하면, 한문 학습을 이수(履修)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독립선언서를 충분히 독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선언서를 필서(筆書)하거나 각석(刻石)할 때에도 강희자전 해서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정문 삼일문. Ⓒ한미일보 

14. 3·1독립선언서 ‘대한민국 관보’ 등 수록 대국민 홍보

 

필자는 보성사판 원본 선언서를 ‘대한민국 관보’에 실어 국민에게 널리 알릴 것을 국민제안 형태로 포천시를 통해 행정안전부와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다. 

 

그 결과 2014년 8월18일, 관보 제18329호에 원본 선언서가 정식으로 수록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민에게 처음으로 원본 선언서를 대대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이어 ‘국회보’ ‘도서관문화’ 등 8개 기관지에도 수록을 요청하여, 원본 선언서가 더욱 폭넓게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15. 고교 국어교과서 선언서의 오류 한자 수정, 수정판 인쇄·배본

 

필자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국어 시간에 독립선언서를 가르치고, 3·1절 기념식에서 선언서를 대독한 경험이 있어 선언서의 한자 오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재교육에서 발간한 고교 국어교과서 상권 116~123쪽에 실린 선언서에서도 여러 오자 한자를 확인하고, 이를 교육과학기술부 편수관에게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수정 요청했으나 반영이 지연되었다. 

 

이에 2010년 11월29일, ‘포천시 2010 평생학습 포천시 교육도시 비전 선포식’에 특별 초청 강사로 참석한 교육과학기술부 이주호 장관에게 직접 수정 필요성을 제안했고, 그 결과 2013년부터 수정된 교과서가 발간·배포되었다.

 

16. 각종 문헌 자료에서의 원본선언서 수록 

 

제안자가 확인한 독립선언서 원본의 모사본(模寫本)은 다음과 같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경인문화사가 발행한 최남선(崔南善)의 ‘조선독립운동사’ 31쪽, 만해기념관에서 발행한 ‘남한산성에서 만해 한용운(韓龍雲)을 만나다’ 38~39쪽, 그리고 삼일정신선양회에서 발행한 ‘獨立宣言書’ 부록에 실린 선언서 모사본 등 총 네 종류의 문헌 자료에서 원본 독립선언서의 모사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 3·1독립선언서 교수‧학습본 편찬 배포, 선언서 필사인쇄본 제작 배포

 

3·1독립선언서를 각급 학교 학생들이 쉽게 독해(讀解)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초등학생과 일반 시민에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제정한 ‘쉽고 바르게 읽는 선언서’를, 중학생에게는 이희승 교수의 ‘국역 3·1독립선언서’를, 고등학생에게는 ‘원본 3·1독립선언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필자는 총 25면으로 구성된 ‘3·1독립선언서 교수-학습본’ 50부를 편찬·제작하여 관내 각급 학교 국어 교사들에게 배본하고 수업에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필자는 선언서를 모조반절지(模造半切紙)에 필사인쇄본(筆寫印刷本) 280매로 직접 필사·인쇄·제작하여 역대 대통령과 관련 부처 장관, 대한노인회를 비롯한 경기도연합회 산하 44개 지회, 그리고 관내 각급 기관 등에 보내 게시(揭示)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독립정신 선양(宣揚)에 대한 관심을 환기(喚起)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18. 3·1운동 100주년기념추진위원회 위원 위촉, 활동 

 

정부의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 업무에서 필자는 ‘3·1운동 100주년기념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양한 문화 행사, 학술 발표, 조사 사업, 자료 공모전 등 여러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후원사업에도 세 차례 동참하였다.

 

또한 ‘3·1정신’ 가을호에 ‘3·1운동 민족대표 서명 33인 중, 박동완 선생이 포천 출신임을 100년 만에 최초로 고증(考證)하다’라는 글을 기고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전 국민과 포천 시민에게 알림으로써 시민들이 큰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19. 3·1문화재단에서 간행한 ‘3·1운동 새로 읽기’ 초판, 재판 간행

 

 3·1문화재단에서 간행한 ‘3·1운동 새로 읽기’ 초판에서 오자 3자를 발견한 필자는, 2013년 9월 5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재단을 직접 방문해 수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 결과 2015년 3월31일, 모든 오류를 바로잡은 개정판이 완벽하게 수정·발행되었으며, 재단은 이를 전국에 무상 보급하여 독립정신 고양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선언서의 한자 오자를 바로잡은 첫 사례로서 각광받게 되었다.

 

또한 선언서 비 가운데 서대문형무소 공원 내에 세워진 선언서비는 하자 없이 정확하게 건립되었으나, 그 외 대부분의 선언서 비는 신문관 판을 바탕으로 제작되면서 여러 오기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20.‘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전 국민에게 보급

 

3·1독립선언서를 일석 이희승이 국역(國譯)한 지 70년 동안, 그 번역본은 고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독립정신을 고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는 문장 독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를 새로 작성하여 대대적으로 홍보·보급하였다. 

 

이를 통해 온 국민이 선언서를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현창(顯彰)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해외 교포들에게는 다섯 개 외국어로 번역·보급하여 독립 정신을 세계적으로 고양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3·1운동의 올바른 이해와 독립운동의 정당성, 그리고 민족의 결의와 각오를 되새기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선언서를 숙독하여 3·1정신을 더욱 고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21. 각급 학교 국어 교과서에 선언서 수록, 독립정신 고양

 

국민의 독립 정신을 높이기 위해 필자는 국어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고등학교에는 원본 3·1독립선언서를, 중학교에는 국역 선언서를, 초등학교에는 ‘쉽고 바르게 읽는 선언서’를 각각 교수·학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국민 제안을 5년간 지속적으로 제출하였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검인정 체제이므로 교육과정 개편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에 비해 초등학교 교과서는 국정이므로, 필자는 전·전 대통령과 전 대통령에게 초등 국어 교과서에 ‘쉽고 바르게 읽는 선언서’를 수록할 것을 제안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이후 2026년 1월6일, 현 대통령에게 다시 국민 제안을 제출했고, 이는 교육부로 이첩되었다.

 

필자는 헌법 전문 서두(序頭)에 나오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인용하여 제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교육부 역시 이 취지에 공감하며 추진 의사를 밝혔고, 그 결과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선언서가 수록될 가능성이 열리게 되어 필자로서는 더없이 큰 감회를 느끼게 되었다.

 

22.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쉽고 바르게 읽는 선언서’ 수록

 

교육부는 2026년 1월20일, 국민제안에 대한 답신에서 교과용 도서를 개발할 때 편찬진과 발행사는 3·1독립정신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며, “앞으로 편찬진과 발행사와 협력하여 교육과정에 적합하고 학생들이 올바른 이념과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를 학교 현장에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이러한 답신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며 국가 교육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선언서(宣言書)


回憶三一獨立運動百七周年(회억삼일독립운동백칠주년)

 

精神獨立國源流 (정신독립국원류) 삼일 독립 정신 국가의 원류이리오

三一宣言百七周 (삼일선언백칠주) 삼일독립선언 백 칠년 되는 해일세.

 

彈壓倭夷連到處 (탄압왜이련도처) 왜이 탄압이 전국 도처에 이어졌고 

示威民衆起街頭 (시위민중기가두) 민중 시위가 가두 마다 봉기하였네.

 

喊聲萬歲高坊曲 (함성만세고방곡) 만세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 높았고

公約三章讀閣樓 (공약삼장도각루) 공약삼장을 팔각루에서 낭독하였네.

 

回憶主權恢復史 (회억주권회복사) 주권 회복해 역사 모두가 회억하며

追崇烈士古今謳 (추숭렬사고금구) 애국 열사 추숭이 고금에 구가하네.

 



늦가을의 찬 바람이 스며들던 2009년 11월, 박동규 전 영북고 교장은 탑골공원 한복판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3·1운동의 발원지, 그곳에 서 있는 독립선언서 비문이 그의 눈을 붙잡았다. 


글자가 달랐고, 서체가 달랐다. 원본 선언서의 한자 표기와 맞지 않는 글자들이 곳곳에 보였고, 민족대표들이 남긴 필체 대신 현대식 활자체가 새겨져 있었다. 역사적 문서의 진정성이 훼손된 그 장면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날 이후 그의 삶은 선언서를 바로 잡는데 쏟았다. 

 

그는 교직 시절부터 그는 선언서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전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퇴직 후에도 그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는 선언서를 다시 읽고, 연구하고, 비교하고, 고증했다. 김소진의 ‘한국독립선언서’부터 최남선의 독립운동사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며, 한 글자 한 문장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탑골공원 비문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5년 동안 정부와 지자체에 제안서를 보냈다. 수차례 반려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종로구청이 원본 선언서를 4배 크기로 복원한 모사판을 건립했고, 문화재로 등재되었다. 한 사람의 집념이 공공 기록을 바로 세운 순간이었다.

 

그의 노력은 교과서로 이어졌다.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선언서에는 수십 년간 잘못된 한자가 남아 있었다. 그는 교육부에 수정을 요청했고, 3년의 설득 끝에 2013년부터 수정된 교과서가 전국 고교에 보급되었다. 학생들은 비로소 정확한 선언서를 배우게 되었다.

 

3·1절 기념식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70년 동안 한자와 옛 표기가 섞인 원문만 낭독되던 관행을 바꾸기 위해 그는 국역본 낭독을 제안했고, 2013년부터 공식 행사에서 한글 번역본이 낭독되기 시작했다. 독립정신이 국민 모두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선언서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관보 게재를 추진했고, 도서관문화지와 전국 도서관을 통해 홍보가 이루어졌다. 3·1운동 100주년에는 직접 제작한 자료를 학교와 도서관에서 상영하고, 기념식장에서는 전시회를 열어 시민들이 선언서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게 했다.

 

포천에서는 지역 독립운동사를 바로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민족대표 박동완(朴東完 1885~1941) 선생의 출신지가 100년간 잘못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문헌과 비문, 족보를 통해 포천 출신임을 고증했다. 


포천 청성공원에 독립선언서비를 건립하도록 제안하고 감수했으며, 지역 독립운동사 수정판 발간에도 참여했다. 지역의 역사적 자긍심을 되찾는 일은 그의 또 다른 사명이었다.

 

특히 근곡 박동완 선생이 포천 출신임을 100년 만에 바로 세운 일은 지역사에 큰 울림을 남겼다. 독립정신은 더 이상 박물관 속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 모두가 함께 이어가야 할 가치임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박동규 교장의 15년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얼마나 조용하고 꾸준하게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간 의지의 기록이다. 


흔들림 없는 성실함과 집요함이 만든 인간 승리의 교범이기도 했다. 나이 90이 넘은 그는 지금도 말한다. “독립정신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언서비를 세우고, 교과서를 고치고, 기념식의 낭독문을 바꾸고, 잊힌 역사를 되살린 그의 손길은 국민과 포천 시민에게 3·1정신을 새롭게 일깨우고, 독립선열에 대한 존경과 지역에 대한 자긍심도 높일 것이다. 

 

그는 검인정 체제로 바뀌며 선언서 교육이 사라진 지 11년. 그 사이 약 670만 명의 학생이 선언서를 배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박동규 교장은 여러 차례 정부와 교육기관에 재수록을 제안했고, 독립선언서가 다시 교과서에 실릴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2026년 1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쉽고 바르게 읽는 선언서’를 수록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학생들이 올바른 가치와 이념을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늦었지만 뜻깊은 변화이며, 독립정신 교육이 다시 국가 교육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의 독립선언서를 오늘에 접목하고 자유 통일의 기본 정신으로 삼으려는 정신적 등불은 이제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빛은 더 많은 이들에게 번져, 독립정신을 다시 세우는 새로운 길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의 15년의 숭고한 노력은 현재와 미래 세대를 비추는 조용한 횃불로 남을 것이다. 그가 지켜낸 업적은 이제 우리 모두가 이어가야 할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박필규 편집위원

 




◆ 박동규(朴東奎)

 

전 영북고 교장, 영북노인대학 학장, 경기북부노인지도자대학 원장,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민족대표, 학림한글학당 훈장, 한국한시협회 포천 회장, 현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지도위원, 포천시사 편찬위원, 포천문화원 평생회원, 포천 한시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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