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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을 체제 전복의 전초전으로 둔갑시키다 [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⑮]
  • 松山 시인
  • 등록 2026-03-03 22: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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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거 부정 항의였던 4·19, 민중 혁명으로 규정
  • 자유주의 시민항쟁, 체제 전복의 신호탄으로 둔갑

4.19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시위하는 장면 [사진=부산민주공원]

1960년 3월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 정권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투표함 바꿔치기, 유령 유권자, 공개투표 강요까지 동원됐다. 특히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조작이 심각했다. 

 

그날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다.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사진은 신문에 실렸고 전국이 들끓었다.

 

4월19일 경찰 발포로 186명 사망

 

4월18일, 고려대 학생 약 3000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들은 정치 깡패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 날 4월19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한양대·동국대 학생들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은 발포했다. 공식 집계 사망 186명, 부상 약 6000명.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4월25일 교수단 시국 선언이 나왔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 12년 집권 체제가 무너졌다.

 

이 사건의 핵심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였다. 헌법 질서 회복 요구였다. 실제로 1960년 6월15일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대통령 중심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었다. 7월29일 총선, 8월12일 윤보선 대통령 선출, 8월 19일 장면 국무총리 취임. 

 

제도는 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당제가 강화되었고, 언론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다.

 

여기까지가 4·19의 기본 구조다. 

 

그런데 직후 일부 세력이 해석을 바꾸기 시작한다. 4·19를 단순한 선거 부정 항의가 아니라 “민중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미완의 혁명”이라는 표현이 대학가에서 유행했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사회경제 체제까지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급격히 정치화된 대학가 


1960년 하반기 대학가는 급격히 정치화됐다. 1960년 10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결성됐다.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1961년 2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통일 문제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 1961년 4월19일 1주년 기념집회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주요 구호로 등장했다. 

 

문제는 시기였다. 북한은 이미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거쳐 반대 세력을 숙청했고, 1958년 전원회의에서 권력 기반을 완전히 정리했다. 김일성 중심의 1인 체제가 굳어졌다. 정치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였다.

 

남한 일부 지식인 담론에서는 이 사실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반공 질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컸지만, 북한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은 약했다. 반미 구호는 확대되었고, 한미동맹 재검토 요구가 잇따랐다. 

 

1960년 11월과 12월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는 “반제국주의” “민족 자주”가 반복됐다. 부정선거 항의로 시작된 운동이 외교 노선 전반을 뒤흔드는 주장으로 확대됐다.

 

노동 현장도 흔들렸다. 1960년 하반기 노조 결성이 급증했다. 파업 건수는 1959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사회 불만이 분출됐다. 자유 공간이 열리자 억눌렸던 요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문제는 요구의 방향이 제도 보완이 아니라 체제 전면 부정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1961년 3월22일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통일 촉구 시위가 열렸다. 일부 집회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요구도 등장했다. 4·19가 자유 선거를 요구한 시민항쟁이었다는 출발점은 점점 희미해졌다. “독재 타도”가 “체제 전환”으로 바뀌었다. 두 문장은 방향이 전혀 다른 주장이다.

 

4월19일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이날 경찰의 발포로 186명이 사망했다.

장면 정부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했다. 정치범을 석방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 불안과 사회 혼란을 동시에 관리해야 했다. 물가 상승, 실업 문제, 정당 간 갈등이 겹쳤다. 야당과 신생 정당이 난립했고, 정치 구도가 불안정했다. 이 틈에서 급진적 구호가 힘을 얻었다.

 

종북 좌파의 급진적 구호, 군부에 명분 제공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사회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4·19가 연 자유 공간이 질서를 세우지 못했다는 점을 공격했다. 

 

종북 좌파의 급진적 구호와 사회적 불안은 군부에 명분을 제공했다. 자유주의 시민항쟁의 결과가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역설이 여기 있다.

 

종북 좌파는 4·19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킨다. 반미·반자본주의 투쟁의 출발점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당시 거리의 다수는 선거 부정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이었다. 북한식 체제를 지향한다고 외치지 않았다. 4·19는 대한민국 헌법 질서 안에서의 저항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역사 해석은 정확해야 한다. 1960년 4월의 함성은 자유 선거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부 세력은 그 함성을 체제 전환의 신호로 재해석했다. 북한 체제의 실상에 대한 냉정한 검토 없이 통일과 반미를 앞세웠다. 자유를 요구한 시민의 힘을 이념 확장의 발판으로 사용했다.

 

4·19 직후의 노선 혼선은 단순한 이론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방향을 둘러싼 현실 정치의 문제였다. 자유주의 시민항쟁을 체제 전복의 전초전으로 둔갑시키는 태도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1960년 4월은 자유를 되찾은 달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판단에서 일부는 길을 잘못 들었다. 그것이 종북 좌파 노선 혼선의 시작점이었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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