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민원 행정 시계는 여전히 밑에서 위로 결심을 구하는 ‘바텀업(Bottom-up)’이라는 낡은 태엽에 묶여 있다.
민원이 접수되면 가장 연차가 낮은 실무자에게 배정되고, 그 실무자가 작성한 초안이 결재라인을 거치며 ‘지침’과 ‘검토’와 ‘보완’이라는 명목하에 살이 붙는다. 뼈대가 약한 상태에서 군살이 붙는 격이다.
정책의 큰 줄기를 잡고 부당한 규제를 풀어야 할 팀장과 장관은 민원 담당 실무자의 보고서 뒤에 숨어, 가벼운 사안은 추인(追認)하고, 갈등이 예상되거나 법령을 고쳐야 할 문제는 현행 법령의 문구만 되풀이하는 ‘도돌이표 행정’에 안주하고 있다. 이는 국가 경쟁력을 선도하는 행정이 아니라 변화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1. 전문직 카르텔과 낡은 규제의 굴레
현재 한국 소방 산업은 이른바 ‘전문직 카르텔’의 병폐에 신음하고 있다. 신기술이 등장해도 국가가 부여한 독점적 형식 승인과 기존 법안과 시행령과 규정의 방패 앞에 무릎을 꿇기 일쑤다. 무선소방산업협동조합 상임이사로 재직중인 필자는 이를 세 가지 악성 규제로 규정한다.
신기술의 진입을 지연시키고 차단하는 ‘가마우지형 규제’
어부가 가마우지의 목에 줄을 감아서 가마우지가 사냥한 물고기를 뺏듯이, ‘가마우지형 규제’는 기존 법안과 시행령으로 후발 주자의 앞서가는 노력과 가치를 지연시키고 결과적으로 기회를 뺏는 규제다. 유선 제품이 주도하는 소방설비 시장에서 무선 소방 제품이 형식 승인을 받고 시장에 진입하는 데 5년이 걸렸다.
AI소방은 불이 난 뒤에 끄는 소방을 넘어 화재 징후를 예측하는 ‘예보 시스템’이 기술적으로 가능함에도, 기존 법령에 ‘예보’라는 단어 한 줄이 없어 현장 적용이 지체되고 있다. 특허 상품으로 출시할 수 있어도 소방 제도권으로 인정되지 못 한다.
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억제하는 ‘코이 물고기형 규제’
아직도 소방 규제의 일부는 70년대 일본의 소방 기준을 모방한 낡은 어항 속에 기업을 가두고 있다. 오작동 없는 지능형 감지기, 화재 예보시스템, AI 방화문, 자동 전개형 활강기, 음장센스 소리봇 같은 공동주택 안전 보장 제품이 국토부와 소방청의 소극적 행정에 가로막혀 ‘아파트 옵션 품목’에 포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의 미적 가치보다 안전이 더 우선적인데 기존 가전제품 중심의 아파트 옵션 품목과의 갈등이 두려워 안전 제품 진출을 방치하고 있다.
대기업 우선 중심의 ‘가물치형 규제’
강력한 포식자인 가물치가 연못의 생태계를 독식하듯, 대기업에 유리한 실적·자산 기준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입찰 시 ‘최근 3년 내 대규모 공사 실적’이나 ‘높은 신용등급’을 필수 요건으로 내세우는 규정이 대표적이다.
이는 혁신 기술을 보유한 강소기업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고 건축법상 기성 제품 위주의 설계 기준(시방서) 고수는 신기술 도입을 어렵게 한다. 분리발주 시대에 맞게 건축법령도 개정을 해야하는데, 건축법령 고수는 중소 소방설비 기업의 자력 발전과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2. 의사결정권자에 의한 ‘선 지침, 후 실행’의 탑다운 행정 혁신
중소기업은 정보와 경험이 가장 많고 결정권을 쥐고 있는 리더(대표)의 지침에서 사업이 시작되고, 조직 시스템에 의한 구체적 정보와 대안이 추가되면서, 리더의 무수한 단편 결심 과정을 통해서 사업을 완성한다. 그렇게 해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원을 제기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경험과 결정권도 없는 실무자가 민원을 접수하고 해결하느라 시간을 끌고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원 행정도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먼저, 최초 민원 배정을 팀장급 이상으로 격상해야 한다. 경험과 혜안을 가진 팀장이 민원의 경중을 판단해 팀장이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즉각 처리하고, 팀의 과제로 해결할 민원은 지침을 내리고, 실무자는 그 지침에 따라 민원을 처리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AI기본법처럼 국가급 과제 관련 민원은 장관이 직접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거나 정책 회의를 주관하여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패스트트랙’이 가동된다면, 실무선에서의 ‘얼버무림식’ 답변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신·구 기술 충돌 조정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19세기 초까지 마차 시대에 자동차가 출시되었지만 자동차 속도 규제로 초기 자동차 산업이 지체되었듯, 유선 소방에서 무선·AI 소방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에서 관료적 해석과 기존 법안 방어에 매몰되면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다.
장관 주재의 협의체를 통해 ‘신·구 기술 충돌 분야’를 점검하고 관계자 회의 주관으로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익을 챙기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3. 민원 행정은 걸림돌이 아닌 발전의 신호탄이 되어야
민원은 행정의 귀찮은 업무가 아니라 국가 혁신의 최전선이다. 의사결정권자의 명확한 지침은 행정력 낭비를 70% 이상 줄이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필자가 제기한 민원 행정 개선 방안은 특정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형 산불과 공장과 아파트의 악성 화재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예보 소방’으로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장관이 앞장서서 규제의 벽을 허물고 실무자가 그 길을 닦는 탑다운 행정 혁신을 기대한다. 대한민국이 낡은 관료주의를 탈피하고 선진 문명의 주관자로 우뚝 서는 길, 그 시작은 바로 ‘책임 행정’의 실천에 있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
무선소방산업협동조합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