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흑백사진을 컬러로 복원. [사진=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탄생 15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는 올해를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로 지정하고 이재명 정부는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BTS 신곡 가사에도 김구가 등장한다.
김구는 임시정부 마지막 주석이며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일 때 김구는 경무국장이다. 이승만은 김구와 상해 임시정부 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승산 없는 일본을 상대로 한 무장투쟁과 테러에 반대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교를 통한 독립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며 미국으로 떠난다.
강도살인 후 피를 찍어 마신 김구
김구 증손 김용만은 민주당 의원이다. 김용만은 12·3계엄 직후 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단상으로 나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국민의힘 강명구 의원 멱살을 잡는 등 폭력을 행사한다.
김용만이 민주당 의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조 종북좌파 김구의 정체성은 민주당과 맞아떨어진다. 민주당이 즐겨 사용하는 행사장도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이다. 김용만의 성정은 김구의 치하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황해도 치하포 한 주막에서 일본 상인 스치다를 때려죽이고 을미사변 당시 국모 살해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김구의 주장과 달리 스치다는 일본군 중위가 아닌 평범한 상인이다. 주모가 국밥을 자신보다 먼저 일본인 상인에게 갖다준다는 이유로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찍어 마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광기와 폭력성을 보여준 사람이 김구다.
김구는 일본 상인을 죽인 후 일본군 중위라고 주장한 후 스치다의 재물을 탈취해서 달아난다. 김구는 살인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 되나 이듬해 탈옥해서 잠적하고 대신 아버지가 붙잡혀 수감 된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김구는 이승만과의 대화 도중 의견이 맞지 않자 이승만을 폭행하고 발로 밟았다는 기록도 있다.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노선이 다른 독립운동가를 여러 명 암살했다는 의혹과 함께 해방 후에도 많은 남한의 우익 지도자 암살에 관련된 정황이 있으며 이승만 암살 시도 의혹도 있다.
김구는 임정 경무국장 시절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17살 소년을 죽이고 김립, 황학선 등을 공금 횡령, 일제의 밀정 등으로 모함하여 죽이고 돈 문제로 안공근을 살해한 혐의도 있다. 안공근은 안중근의 동생이며 그들의 아버지 안태훈은 김구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고 일본군에 패하자 김구를 집에 들이고 상당 기간 보살핀 적이 있다.
김구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 그리고 백의사, 대한민청, 서북청년단 등이 행한 살인, 테러 행위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있다.
김구는 사람 죽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다. 현재 민주화를 밥벌이와 출세의 도구로 삼는 민주팔이 종북 좌파 세력이 있다면 100여 년 전 당시엔 독립운동을 밥벌이와 개인의 출세욕을 위한 도구로 삼는 독립팔이가 있었다.
스치다를 일본군 중위로 조작한 것과 같이 거짓의 산이 된 김구의 백범일지도 김구가 아닌 춘원 이광수의 작품이라는 게 김구의 아들 김신의 고백이다.
김구의 이승만 암살 기도 정황과 북한 내통 의혹
김구의 폭력은 그가 안두희에게 암살된 당일에도 이어진다. 안두희는 1955년 발간된 저서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살해했나’에서 암살 당일 상황을 기술한다. 현역 장교이자 김구의 한국독립당 비밀 테러 조직의 요원인 안두희는 1949년 8·15 광복 기념식을 기해 자신에게 내려질 주요 임무가 이승만 암살이라는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김구를 찾아간다.
1945년 12월1일, 임정요인 환영식장에서 이승만(왼쪽)과 김구. 흑백사진을 컬러로 변환.
김구가 △송진우·장덕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 △경찰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악하고 있으나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의 지위를 이용해 군대를 불법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의혹 △김구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 △여순반란사건에 김구의 한독당이 관련되었다는 의혹에 대해 질문하자 김구는 “그래 이놈아, 이것이 정부 구실은 한다는 말이냐?”라며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흥분하여 안두희를 주먹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벼루와 붓, 책 뭉치 등을 안두희에게 집어 던진다.
안두희는 김구의 이 답변으로 김구가 이승만을 제거하려 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북한의 노선과 같은 입장이냐는 안두희의 질문에 김구는 ‘네 멋대로 해석하렴’이라고 답변한다.
안두희는 김구에게 평양 방문 이후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이승만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하고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항의하고 북한 김일성의 공산당 노선에 끌려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따진다.
그러자 김구는 ‘공산당이면 어때서?’라고 대답한다. 김구의 정체성을 알게 된 안두희는 김구의 이승만 암살 기도를 바꿀 수 없다는 판단에 권총을 뽑아 ‘영감과 나라를 바꿉시다’라고 외치며 김구를 향해 네 발을 발사한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라면 공산당이든 뭐든 상관없다. 이념도 철학도 국가관도 없이 자신의 입신양명과 출세, 집권만이 최고의 가치이며 독립운동을 자신의 출세와 밥벌이 도구로 사용하고 정적을 무차별 암살한 것이 살인강도 전과자 김구의 살아온 궤적이며 김구의 실체다.
광복 후 송진우와 국내파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회의에서 김구 등 임정 요인이 친일파 척결을 강경하게 요구하자 송진우는 당신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어디서 친일파 타령이냐고 일갈하자 김구와 임정 요인들이 침묵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만주와 소련, 상해 등 여러 곳에 설립된 임시정부와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의 히로히토 일왕 암살 시도와 일본군 장성 암살 등 몇 건의 테러 행위 외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다.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는 의미 없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임시정부가 대대적 승전으로 조작해서 극심한 생활고로 군자금 지원을 꺼리는 만주 조선인으로부터 군자금을 갈취하기 위해 이용한 경우이며 이봉창, 윤봉길 역시 자금난을 겪는 임시정부가 중국과 국내 후원자로부터 지원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독립군의 상징인 김좌진조차 만주의 한인들에겐 마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운 존재다. 중국 관헌에 바치는 세금과 지주에게 바치는 소작료를 제외하고 나면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만주 한인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군자금을 갈취하던 게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실체다.
김좌진 암살의 이유도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의 만주 한인 갈취와 살인이다. 확보된 군자금과 지원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임시정부 내 계파 간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전개되고 그 중심에 김구가 있다고 송진우가 일갈하자 임정 요인들이 조용해진 이유다.
대한민국 전복을 꿈꾼 주사파의 효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무장투쟁과 테러 행위를 반대하고 미국과 서방 세계와의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한다.
일본은 당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국이었으며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G2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유럽 국가들이 초토화되는 사이 참전하지 않은 미국과 일본은 전화를 피하고 수년간의 전쟁 특수를 누렸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한국엔 지금도 없는 항공모함을 십여 척 가지고 항공기 보유는 수천 대에 이르렀다.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에 이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막강한 국력의 소유자였으니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천재일우로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미국이 아닌 일본 중심으로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을 때도 일본은 일본 국내 700만 명, 중국 200만 명, 태평양 100만 명, 조선 30만 명 등 10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동경에 가지 않고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 문서 서명식을 한 이유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김구의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의미 없는 일시적인 분풀이에 불과한, 일본을 상대로 한 무장투쟁과 테러 활동을 이승만이 반대한 배경이다.
“나의 총사령부는 우선 요코하마에 두며 항복식은 도쿄만에 정박 중인 미주리호 함상에서 하기로 했다. 일본이 제기한 이의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내가 아산키 비행장에 내리려는 계획을 반대했다. 일본은 그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참모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최고 사령관이 무기도 갖지 않은 몇 명의 참모를 대동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착륙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완전무장한 적군이 우글거리는 적국의 비행장인데다가 간토 평양에도 일본군 22개 사단 30만의 전투부대가 남아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당시 미국의 영국대사 윈드롭 올드리치가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윈스턴 처칠 씨는 전쟁 동안 모든 사령관이 했던 일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훌륭한 업적인가 알아 맞춰보라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더니 그것은 장군께서 아직도 무장도 해제하지 않은 수십만의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원조 종북좌파 김구와 김영삼의 5·18 특별법
김구의 임시정부는 사실상 이름뿐이었으며 대외 활동은 고사하고 대부분 요인이 모두 떠나 명맥을 유지하고 요인들이 생계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으며 그나마 남은 사람끼리 파벌싸움으로 지새운다. 충칭 미국대사관 보고 문건에 나오는 김구의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이다.
1921년 1월1일 임시의정원 신년하례회.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가 김구.
“가치 있는 움직임을 위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능력이 없으며 단순히 일본이 최종적으로 패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추진하고 개인적 재산을 불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중국 당국의 비용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진다.”(김상구 ‘김구 청문회’)
이것이 당시 김구의 임시정부 실체이며 미국이든 중국이든 누구도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다.
종북 좌파가 김구를 추앙하는 이유는 김구가 원조 주사파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귀국한 김구는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후 김일성 수하로 전락해서 미국이 지원하는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소련 공산당이 지원하는 김일성의 군대에 의한 남한의 적화통일을 기다린다.
김구의 평양 방문 후 유엔한국위원회 중국 대표 류위완 공사와 나눈 대화 내용에 따르면 김구는 소련의 도움으로 잘 무장된 김일성의 군대가 남한을 침공해서 쉽게 서울에 인민공화국을 세울 것이라고 얘기한다. 김구는 김일성의 남침을 돕기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도 주장한다. 이것이 원조 종북좌파 김구의 실체다.
김구가 자신의 계획대로 이승만을 암살한 후 집권해서 김일성과 연합했다고 가정할 때 그 후 역사는 명약관화이다. 마르크스 레닌 이래의 전통적인 공산당의 통일전선 전략에 의해 김구는 숙청당하고 대한민국은 공산화가 된다.
그것이 2차 대전 이후 소련 공산주의가 유럽과 아시아에 전파된 역사이며 박헌영과 수많은 남로당 출신, 그리고 북한의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와 연안파 등 중국 공산당 계열 북한 인사들이 숙청된 역사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관계와 같다. 소련과 북한 김일성 공산 집단의 방해에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노력하는 이승만을 김구는 사사건건 방해하고 김대중은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한 노력을 사사건건 반대한다.
차이점은 김구는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으나 김대중은 살아남았으며 박정희가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다. 김대중은 5.18 관련 내란죄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두환에 의해 사면된다.
1987년 소위 민주화 운동의 바람을 타고 집권한 김영삼은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김대중의 내란과 광주 5·18 무장 폭동으로 대법원이 판결한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조작한다.
또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의 정당한 업무 집행인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조사를 위한 연행을 반란으로 처벌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뇌물죄로 기소하고 수천억 원의 추징금과 함께 징역형도 받게 한다.
1993년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 직후 검찰의 12·12 관련 전두환과 노태우 수사 결과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종결한 것이다. 그러나 1995년 노태우의 4000억 원 불법 정치자금과 함께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전달한 3000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 불거지자 김영삼은 돌변하여 자신과 김대중의 불법 정치자금은 덮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불법 정치자금을 뇌물로 처벌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두환과 노태우를 12·12 반란으로 처벌한다.
원조 종북좌파 김구를 이어받은 김영삼은 5·18 특별법으로 대한민국 종북좌파의 숙주가 되었으며 종북좌파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의 적화를 위해 오늘도 민주주의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선전 선동과 세뇌를 통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진행 중이다.
종북좌파의 세뇌와 선전 선동의 결과물인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정확한 표현은 1987년 공산화 운동이며 5·18 민주화 운동은 5·18 공산화 운동이다. 4·19와 5·18, 제주4·3, 여순반란, 대구폭동, 부마사태, 사북사태 등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의 모든 대규모 시위와 폭동에는 북한 개입 의혹이 있다.
북한의 대남 적화 공작의 정점, 부정선거 의혹
북한의 대남 적화 공작의 정점에 부정선거 의혹이 있다. 부정선거는 5·18과 6·25 남침과 같은 힘겨운 무장투쟁 없이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는 지름길이다. 대한민국 부정선거 의혹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 김대중이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김대중은 경호 수칙을 어기고 경호원 없이 김정일 전용차에 올라 45분간 김정일과 밀담을 나눈다.
미국 정보당국이 입수한 밀담의 내용에 관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노무현을 민주당 차기 대선 후보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노무현 인지도가 정동영이나 한화갑보다 낮다는 김대중의 말에 노무현 아버지의 고향이 호남인 점과 빨치산 출신인 노무현 장인의 출신 성분을 거론하며 김정일은 여론이나 인지도는 선전 선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선거 문제는 우리와 연구를 많이 합시다”라고 얘기한다.
김대중과 김정일 회담 결과 2002년 전자개표기가 처음 도입되었으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과 대선에서 노무현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그해 12월 대통령에 당선된다. 2002년 김대중 정권에서 최초로 도입된 전자 개표 시스템은 관우정보통신, 한틀시스템, SK C&C에서 납품과 운영을 맡았으나 이들 기업 관련자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다.
재판 과정에서 김대중, 이해찬, 박지원 등이 부정 전자개표기 제작을 주문했다는 제작업체 대표의 양심선언이 있었으나 검찰이 수사하지 않는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남북통신망 사업, 다산 그룹과 한국전자투표 주식회사의 좌파 정권 연계 의혹, 화웨이의 백도어를 통한 선관위 네트워크 조작 의혹 등이 불거진다.
지난 수십 년간 종북좌파의 선전 선동과 세뇌, 그리고 자유 우파의 분파적 개인주의와 게으름의 결과 대한민국은 이미 적화되었으며 적화통일만 남은 단계다.
북한의 대남 적화 공작과 종북좌파의 모든 종류의 공산화 운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며 민주당과 종북좌파는 5·18을 헌법 전문에 넣기 위한 시도를 계속한다. 5·18 헌법 전문 수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를 근거로 현재의 5·18 왜곡금지법을 넘어서는 5·18뿐 아니라 4·3 등 북한의 모든 대남 적화 공작을 민주화 운동으로 만드는 법이 제정될 것이며 부정선거 의혹 규명은커녕 부정선거 의혹 제기 금지법도 제정될 것이다.
민주당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독재적 입법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부정선거다. 부정선거 시스템에서는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며 부정선거 시스템을 만드는 세력이 주권자이며 국민은 노예다. 이해찬이 민주당 50년 집권론을 주장하고 2024년 총선에서 김민석 민주당 총선 상황실장이 사전투표율 31.3%를 소수점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이유다.
사전투표는 부정선거 의혹의 핵심이다. 작년 대선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본투표에서 54% 득표로 민주당 후보 이재명의 34% 득표를 압도한다. 그러나 사전투표에서 김문수는 25%, 이재명은 62%를 득표해 이재명이 전체 득표율 49%로 김문수의 41%를 누르고 승리한다.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이런 본투표와 사전투표 득표율의 괴리는 본투표와 사전투표 득표율이 거의 일치하는 개혁신당 이준석과 민노당 권영국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준석의 본투표 득표율은 9.64%이며 사전투표 득표율은 10.34%다. 권영국의 본투표 득표율은 1.26%이며 사전투표 득표율은 1.30%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유인 부정선거 의혹 규명에 대해 이재명은 작년 대선 유세 중 “부정선거인데 왜 본인이 당선됐냐, 내가 부정했다는 것이냐. 부정을 하면 내가 확 이기게 하지 살짝 지게 하겠냐”고 말한다.
2025년 대선 때 이재명과 김문수의 사전투표 득표율 62% 대 25%와 본투표 득표율 34% 54%의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노골적인 괴리가 나온 배경이다.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이 0.7% 차이로 윤석열에게 패배한 이유는 부정선거 의혹을 의식한 작은 차이의 조작이다. 윤석열의 당선은 사전투표 조작을 무력화하는 압도적인 득표율의 결과다.
김문수는 부정선거 의혹을 이유로 한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대신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김승복, 김철봉이란 별명을 얻는다.
자신의 운동권 투사 경력을 반성하기는커녕 대단한 경력으로 내세우는 종북주사파 운동권 출신 김문수는 명백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확실한 부정선거의 증거를 가져오면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등의 궤변으로 자신의 옛동지인 종북좌파 세력의 부정선거 의혹을 덮어준다.
이것이 원조 종북 좌파 김구 이래 뿌리 깊은 대한민국 종북 좌파의 실체다. 종북 좌파의 역사와 실체를 알고 북한 공산집단과 종북좌파의 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는 첫걸음이다.

◆ 황두형
前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
前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