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올림픽공원역 일대에 붙어 있는. 손으로 쓴 벽보와 손팻말. Ⓒ한미일보
평소 같았으면 건조하게 몇 마디 대화를 섞고 넘겼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알량한 지적 우월감을 뽐내던 객(客, 페이스북 방문자) 하나를 기어이 ‘또’ 차단해 버렸다.
내가 6·3지선 개표에서 쏟아진 ‘쌍둥이 득표’ 현상을 무속 신앙에 빗대며 ‘부정선거’를 언급하자 그는 득달같이 달려와 ‘지능’을 언급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대만 사례에서도 있었고 통계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우연인데, 왜 팩트 없이 선동하느냐”는 준엄한 훈계였다.
(박주현 작가는 같은 날 앞선 포스팅에서 869건의 ‘쌍둥이 득표’ 출현조차 “모두 확률적으로 가능한 우연”이라고 부르짖는 작금의 선관위를 두고, 선거를 관리하는 행정 기관이 아니라 우연과 기적을 창조해 내는 거대한 굿당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했다. 편집자 주)
그래, 통계학자들의 말마따나 그 숫자 자체는 가능한 우연일 수 있다. 나 역시 글에서 인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둘러싼 국가 기관의 경이로운 야만성이다.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를 내쫓고, 남의 지문을 프리패스시키고, 법원의 현장 검증 직전에 핵심 물증이 담긴 상자를 쓰레기차에 실어 불태워버린 선관위다.
심판이 대놓고 룰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끔찍한 파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데, 거기에 ‘통계적 기적’까지 더해졌다면 합리적인 시민으로서 당연히 거대한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대목에서 문득 헛웃음 섞인 한탄이 흘러나온다. 대체 왜 우리 보수만 늘 이토록 피곤하게 100% 완벽한 증거를 찾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산기슭을 어슬렁거려야 하는가.
범죄를 저지른 선관위가 ‘헌법기관’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밀실의 문을 걸어 잠가, 수사조차 막고 있는데 티끌 하나 없는 과학적 물증을 대령하기 전까지는 주권자가 의심의 돌멩이 하나 던지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토록 과학과 팩트를 사랑하시는 분들에게 건조하게 되물어보자.
과거 좌파 진영이 온 나라를 마비시켰던 그 거대한 선동의 역사 속에, 도대체 무슨 알량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이라며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광우병 사태.
참외가 전자파에 튀겨진다던 사드 괴담. 소금을 사재기하던 후쿠시마 선동까지. 삼류 소설만도 못한 미개한 괴담과 무속 신앙 수준의 공포를 무기 삼아 국가의 숨통을 조일 때, 그들은 그것을 “대중의 합리적 불안”이라며 거룩하게 묵인했다.
그런 자들이 왜 선관위의 명백한 행정 파산 앞에 분노하는 우파 시민들에게만 갑자기 엄격한 노벨상 후보급 통계학자로 빙의하여 ‘지능’을 운운하는가. 이 지독하고 역겨운 내로남불 앞에서는 비웃음조차 아깝다.
물론, 우리 보수가 저 좌파 카르텔처럼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을 날조하고 덮어놓고 선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보수의 무기는 차가운 이성이어야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국가 기관이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증거를 태우고 있는데, “법적 증거가 없으니” 점잖게 중립 기어를 박고 헛기침이나 하자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비겁함’이다.
권력이 은폐하려 할 때, 의심은 주권자가 쥘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방어권이다. 그 의심의 목소리를 지능 탓으로 뭉개며 쿨한 척 선을 긋는 것은, 이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주를 방관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공범 선언일 뿐이다.
그러니 알량한 지능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 점잖은 분에게 마지막으로 ‘뜨거운 안녕’을 남긴다.
당신의 그 뛰어난 지능은 잘 알겠으니, 부디 나처럼 촌스럽고 지능 낮은 사람의 글에는 얼씬거리지 말고 당신 수준에 맞는 고상한 곳에서 노시라.
국가의 헌정 질서가 개판이 되고 참정권이 짓밟혀도, 그 대단히 높은 지능 덕분에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아주 여유롭게 버티실 만한가 보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갈 때도 부디 그 고상한 중립, 끝까지 훌륭하게 지키시길 바란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