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체조경기장 진입을 요청하는 기자회견 중인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우) "패가망신" 발언으로 국회의원 항의 방문을 받은 박정보 서울경찰청장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이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에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진입을 요청한 것을 두고, 경찰이 진행 중인 배임 수사를 지렛대로 유 회장에게 기자회견을 열고 공권력 행사를 요청하도록 압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미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지난 8일 유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유 회장은 대한탁구협회장 재임 당시 협회 후원금 유치에 따른 인센티브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유 회장의 동생이 받은 약 2억 원의 인센티브를 유 회장이 사실상 차명 수령한 것인지 수사하고 있다.
그런데 유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가 이뤄진 지 일주일 만인 15일 오전,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유 회장을 지난 8일 조사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박 청장은 같은 자리에서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불법행위에 동조했다가 공범으로 적용되면 패가망신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이날 오후 예정된 대한체육회 기자회견을 지켜본 뒤 경찰의 향후 조치를 고민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유 회장은 같은 날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9개 회원종목단체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업무 공백으로 인한 피해액이 60억 원까지 불어났다”며 “가능한 한 빨리 공권력을 투입해 사무처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했다.
경찰이 오전에 대한체육회 기자회견을 향후 조치의 판단 기준으로 공개 거론하고, 오후에는 경찰 조사를 받은 유 회장이 거액의 피해를 내세워 공권력 행사를 요청한 것이다.
부풀린 피해액 60억, 사실은 6월 예산 집행 예정액
그러나 유 회장이 경찰 진입의 긴급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피해액 60억 원’은 실제 발생한 피해액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인 피해 상황에 대해 알려달라"는 한미일보의 질문에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상황이 진행 중이어서 피해액을 완전히 산출한 것은 아니다”며 “60억 원은 9개 회원종목단체가 6월 말까지 집행해야 할 금액”이라고 답했다.
이미 발생해 회복할 수 없게 된 손실이 아니라, 이달 말까지 각 종목단체가 사업비와 인건비 등으로 집행해야 할 예정 금액이라는 설명이다.
집행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는 금액과 실제 발생한 피해액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도 유 회장은 집행 예정액을 ‘업무 공백으로 인한 피해액’이라고 발표했다.
복수의 매체도 별도의 산출 근거를 확인하지 않은 채 “피해액이 60억 원까지 불어났다”, “피해 규모가 60억 원에 달한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60억 원’이라는 숫자는 핸드볼경기장에 대한 경찰 진입의 긴급성과 정당성을 부각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됐다.
경찰은 기자회견 내용을 미리 알았나
의혹의 핵심은 유 회장이 피해액을 과장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조사한 경찰이 진행 중인 수사를 지렛대로 삼아, 유 회장에게 경찰 진입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도록 요구하거나 압박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경찰이 강제로 시위 참가자들을 밀어내고 경기장에 진입하려면 업무방해를 당하고 있는 시설 이용자나 입주 단체의 명시적인 요청이 중요한 명분이 될 수 있다.
유 회장의 기자회견은 경찰에 바로 그 명분을 제공했다. 체육계의 대표자가 막대한 피해를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공권력 행사를 요청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박 청장이 기자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한체육회의 기자회견을 지켜본 뒤 향후 조치를 고민하겠다”고 말한 점도 석연치 않다.
경찰이 기자회견에서 어떤 내용과 요구가 나올지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아직 열리지도 않은 기자회견을 향후 경찰 조치의 판단 기준으로 공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시간적 흐름도 의혹을 키운다
경찰은 8일 유 회장을 피의자로 조사했다. 15일 오전 박 청장은 조사 사실을 공개하면서 체육회 기자회견과 향후 경찰 조치를 연결해 언급했다. 같은 날 오후 유 회장은 확정되지 않은 60억 원을 피해액으로 내세워 경찰에 진입을 요청했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대한체육회 산하 종목단체 관계자들의 핸드볼경기장 진입이 추진됐다. 국민의힘 중재로 단체별 관계자들이 필요한 물품을 반출하는 방안이 마련됐지만, 현장 참가자 1명이 출입문을 막아서면서 결국 무산됐다.
배임 수사가 ‘지렛대’였나
현재까지 경찰이 배임 수사를 빌미로 유 회장을 직접 협박하거나 공권력 요청을 강요했다는 증언이나 문서가 공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찰의 피의자 조사와 체육회의 공권력 요청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이어졌고, 경찰청장이 기자회견 전부터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유 회장이 제시한 핵심 피해액마저 실제 피해액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단순한 우연으로만 넘기기 어려운 이유다.
서울경찰청은 8일 유 회장 소환조사 이후 15일 기자회견 전까지 유 회장 또는 대한체육회 관계자와 접촉했는지 밝혀야 한다.
경찰 또는 송파경찰서 관계자가 기자회견 개최를 제안했는지, 공권력 행사 요청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달했는지, 기자회견문이나 발표 내용에 관여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특히 경찰은 유 회장이 ‘60억 원 피해’를 발표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이 금액이 실제 피해액인지 확인한 적이 있는지 밝혀야 한다.
유 회장도 답해야 한다
경찰 조사 과정이나 조사 전후에 핸드볼경기장 문제와 관련한 대화가 있었는지, 경찰로부터 기자회견이나 공권력 행사 요청을 요구받거나 권유받은 사실이 있는지 유 회장이 먼저 공개해야 한다.
아직 집행 기한이 지나지도 않은 예정 금액을 왜 이미 발생한 피해액처럼 발표했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경찰은 유 회장의 요청을 받고 움직이려 한 것인가. 아니면 경찰이 움직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수사를 받는 유 회장에게 요청하도록 압박한 것인가.
‘피해액 60억 원’의 실체가 흔들린 이상, 이제 밝혀야 할 것은 그 숫자를 누가 만들었고 누가 필요로 했느냐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