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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한미칼럼] 영악한 권력을 이기는 법
  • 김영 기자
  • 등록 2026-07-02 11: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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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악한 권력은 늘 체스판을 먼저 깔아놓는다
  • 드레퓌스 사건이 보여준 기록의 힘… 진실은 늦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는 판 자체가 잘못됐다는 시민 선언

거대한 미로 중앙의 나침반이 출구를 향해 빛을 비추고 있다. 법전·투표함·신문·마이크·카메라가 미로 벽에 갇힌 듯 배치된 가운데, 바깥의 시민 행렬은 어둠을 벗어나 빛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권력이 만든 미로 속에서도 진실은 길을 잃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사진=한미일보 그래픽]

영악한 권력은 늘 체스판을 먼저 깔아놓는다. 말의 위치도, 움직일 길도, 승패의 규칙도 자신들이 정하려 한다. 돈이 있는 자는 시간을 사고, 권력이 있는 자는 제도를 흔들며, 간판이 있는 자는 여론을 포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판 위에서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사람은 그 체스판 위에서 더 나은 수를 찾는 사람이 아니다. 판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더 영악해지려 하지 않고, 더 교활해지려 하지 않으며, 더 큰 계산으로 맞서려 하지 않는다. 권력이 만든 계산법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 그것이 출발점이다. 결국 이기는 길은 하나다. 진정성으로 직진하는 것이다.

 

성적과 간판으로 만들어진 엘리트 세상을 탓할 필요는 없다. 공부를 잘한 사람이 좋은 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 엘리트들이 권력이 된 뒤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정의를 무너뜨리고, 자유를 짓밟고, 법을 자신들의 생존 도구로 바꿀 때 분노는 정당해진다.

 

한때 이 나라에서는 “법대로만 판결해 달라”는 요구가 법정을 흔들었다. 국민이 요구한 것은 특혜가 아니었다. 보복도 아니었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판결도 아니었다. 그저 법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권력을 잡자 이제는 아예 법을 바꿔버리려 한다는 원성이 21세기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을 요구하던 시대에서, 법 자체가 권력의 방패가 되는 시대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사를 공격하고, 수사가 불편하면 수사기관을 흔들고, 제도가 걸림돌이 되면 제도를 바꾸겠다고 한다. 권력은 그렇게 법을 지키는 척하면서 법치를 비운다.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도 처음에는 그런 구조였다. 군부와 국가권력은 한 사람에게 죄를 씌웠고, 언론과 여론은 진실보다 증오를 먼저 선택했다. 드레퓌스는 약했고, 권력은 강했다. 진실은 처음부터 승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롱당했고, 고립됐고, 짓밟혔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는 글로 권력의 거짓을 정면으로 겨눴다. 그 글 하나가 곧바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진실은 느렸고, 권력은 집요했다. 그러나 기록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의 본질은 한 사람의 억울함을 넘어, 국가권력이 진실을 덮을 때 기록과 양심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권력이 쌓아 올린 거짓의 성벽은 결국 반복되는 질문과 기록 앞에서 금이 갔다.

 

영악한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천재적 책략가가 아니다. 그들은 머리 좋은 사람을 회유할 수 있고, 고립시킬 수 있으며, 계산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끝까지 기록하는 사람, 잃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 진정성으로 직진하는 사람은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은 매수할 수 없고, 길들일 수 없으며, 쉽게 침묵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포판’을 말한다. 출세를 포기한 판사라는 뜻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록과 양심과 법리에 따라 판결하는 판사 말이다. 이제는 출포검, 출포경까지 많아지기를 빌어야 하는 세상이 됐다. 출세를 포기해야만 정의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심각하게 병든 사회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망가진 언론판이다. 법이 흔들리고, 권력이 오만해지고, 사법과 수사기관이 눈치를 볼 때 마지막으로 버텨야 할 곳이 언론이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국민이 보지 못한 곳을 봐야 하고, 국민이 묻기 어려운 것을 물어야 하며, 국민이 잊지 않도록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언론마저 권력의 나팔수가 되고, 돈의 하청업체가 되고, 진실보다 진영을 먼저 고른다면 국민은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가. 권력의 폭주는 언론의 침묵을 먹고 자란다. 거짓은 언론의 방조 속에서 커지고, 불의는 언론의 선택적 분노 속에서 제도처럼 굳어진다.

 

이것이 이재명 정권 입장에서 올림픽공원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번지는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의 외침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 구호는 단순한 정치적 반대 구호가 아니다. 권력이 깔아놓은 체스판 위에서 더 좋은 수를 찾겠다는 말도 아니다. 판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시민의 선언이다.

 

“부정선거 재선거”는 결과만으로 정당화되는 선거는 없다는 요구다. “당일투표 수개표”는 국민의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절차를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부르지 말라는 요구다. 이 구호가 무서운 이유는 과격해서가 아니다. 단순해서다. 복잡한 법리와 제도 논쟁을 뚫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다시 세우기 때문이다.

 

영악한 권력은 늘 미로를 만든다. 국민이 길을 잃고, 언론이 방향을 잃고, 사법이 출구를 잃게 만든다. 그러나 진실은 지도보다 나침반에 가깝다. 모든 길을 다 알지는 못해도, 어디가 북쪽인지는 끝까지 가리킨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그 나침반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한미일보가 보는 현실이다. 지금의 싸움은 단순한 정권 비판도, 진영 간 감정싸움도 아니다. 법을 법답게 세우고, 선거를 선거답게 돌려놓고, 언론을 언론답게 회복하자는 싸움이다. 영악한 권력이 체스판을 깔고, 규칙을 바꾸고, 국민에게 침묵을 요구할 때 필요한 것은 더 교활한 전략이 아니다. 판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시민의 진정성이다.

 

법이 칼이 되고, 민심의 대리인이 변절자가 되고,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 세상이라면 답은 하나다. 권력이 만든 계산법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분노만 소비하다 지쳐서도 안 된다. 끝까지 기록하고, 끝까지 말하고, 끝까지 직진해야 한다.

 

영악한 권력을 이기는 가장 무서운 힘은 흔들리지 않는 진정성이다. 권력은 계산으로 오래 버틸 수 있다. 돈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간판은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기록된 진실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까지 영원히 이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 없다. 걱정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 반항이라는 감정에 갇혀 스스로를 태울 필요도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봐야 할 것을 보고, 써야 할 것을 쓰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면 된다. 영악한 권력은 결국 그런 사람들을 가장 두려워한다. 계산하지 않고 직진하는 사람들, 잃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진실을 붙드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무너진 판을 다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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