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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세계와 사상’ ④문학은 독자 대신 생각한다: 인물 동일시 [특별기고: 松山]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12 18: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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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2016년 영국 국립극장(NT)에서 공연된 ‘햄릿’. [사진=NT]

철학은 명제를 세우고 역사는 사건을 배열한다. 그러나 문학은 사람을 만든다. 

 

문학은 작가의 머릿속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그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문학은 언제나 인물을 통해 사유한다. 

 

1. 인물은 왜 독자 대신 생각하는가

 

셰익스피어: 햄릿은 왜 우리 대신 망설이는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1603~1604년경 초연)은 인물 동일시의 교과서다. 햄릿은 행동보다 생각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복수를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곧장 칼을 들지 않는다. 그는 독백한다. “To be, or not to be.”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이 독백은 독자의 사고를 점령하는 문장이다. 햄릿이 망설이는 동안 독자도 멈춘다. 햄릿이 의심하면 독자도 의심한다. 그는 단순한 극중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유의 통로다. 

 

우리는 햄릿을 보며 답답해하면서 동시에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의 망설임은 우리의 망설임과 닮았기 때문이다. 결단을 미루는 인간. 과잉 분석에 빠지는 인간. 이때 햄릿은 우리를 대신해 생각하는 인물이 된다.

 

괴테: 베르테르는 왜 우리 대신 절망하는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이 작품은 인물 동일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베르테르는 사랑에 실패하고 자살한다. 문제는 독자들이 그를 따라 했다는 점이다. 18세기 유럽에서 ‘베르테르 열풍’이 일어났다. 실제 자살 사건들이 보고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베르테르는 자신의 고통을 길게 서술한다. 그는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한다. 독자는 그의 고통을 하루하루 따라간다. 어느 순간 그의 선택은 낯설지 않게 된다. 

 

이것이 동일시의 극단적 사례다. 인물이 대신 느끼고, 대신 절망하고, 대신 결단한다. 독자는 그 사고 경로를 따라간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 경로를 재현한다.

 

문학은 사상을 직접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체험하게 만든다. 체험은 판단보다 오래 남는다.

 

도스토옙스키: 라스콜리니코프는 왜 우리 대신 죄를 합리화하는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한다.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다. 그는 위대한 인간은 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이론을 가진 인물이다.

 

‘죄와 벌’(1866)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독자는 그의 살인을 목격한다. 그러나 곧장 비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의 가난, 고립, 자존심을 충분히 따라왔기 때문이다. 

 

살인은 갑작스럽지 않다. 준비된 결과처럼 보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리 대신 위험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우리는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사고 실험을 그의 몸을 통해 진행한다. 

 

이때 동일시는 윤리적 긴장을 만든다. 우리는 그를 이해하면서도 거부한다. 이해와 거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이 긴장이 문학의 힘이다.

 

2. “나라면”이라는 함정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는 왜 우리 기준을 흔드는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 안나는 불륜을 저지른다.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이는 치명적인 일탈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녀를 단순히 비난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그녀의 외로움, 사랑의 갈증, 사회의 위선을 충분히 따라간다. 그녀의 선택은 충동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처럼 보인다. 독자는 “나라면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저 상황이면 이해할 수 있다”라고도 말한다. 판단이 이중화된다. 동일시는 윤리 기준을 유연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이 함정이다.

 

알베르 카뮈: 뫼르소는 왜 우리 대신 무심해지는가?

 

카뮈의 ‘이방인’(1942).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는 우연히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큰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

 

독자는 불편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끌림을 느낀다. 뫼르소는 사회적 위선을 거부한다. 그는 꾸미지 않는다. 이 솔직함이 독자의 내부에 숨겨진 무관심과 연결된다. 그는 우리 대신 냉혹해진다. 우리는 그의 차가움을 체험한다. 그리고 사회적 규범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3. 타인의 선택이 내 기준이 될 때

 

조지 오웰: 윈스턴 스미스는 왜 우리 대신 저항하는가?

 

조지 오웰의 ‘1984’(1949). 윈스턴은 전체주의 체제에 저항한다. 그는 일기를 쓴다. 금지된 사랑을 한다. 독자는 그의 내부 독백을 따라간다. 그의 저항은 거창하지 않다. 소소하다. 

 

그러나 독자는 그 소소함을 위대하게 느낀다. 왜냐하면 그의 두려움과 고립을 함께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때 독자는 저항이라는 행동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지만 저항의 내면을 경험한다. 그 경험은 현실에서 판단 기준이 된다.

 

한강: 영혜는 왜 우리 대신 침묵하는가?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 영혜는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점점 사회적 관계에서 이탈한다. 그는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독자는 답답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침묵을 따라가게 된다. 그는 사회의 강요에 말로 저항하지 않는다. 몸으로 거부한다.

 

이 작품은 동일시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말 많은 인물뿐 아니라, 말 없는 인물도 독자의 내부를 점령한다. 우리는 그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억압 경험을 투사한다.

 

4. 동일시는 어떻게 집단으로 확장되는가

 

문학은 개인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 교과서, 영화화, 대중적 인용을 통해 집단 기억으로 이동한다. 햄릿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상징이 된다. 베르테르는 낭만적 청년의 모델이 된다. 안나는 억압된 여성의 상징이 된다.

 

이때 동일시는 개인 차원을 넘어 문화적 기준이 된다. 문학은 규범을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물을 통해 반복적으로 어떤 유형을 미화하거나 비판하면, 그 유형은 사회적 상징이 된다. 상징은 판단의 지름길이다.

 

5. 동일시는 왜 위험하면서도 필요한가

 

동일시는 사고 실험이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선택을 안전하게 체험하게 해준다. 살인, 배신, 저항, 절망, 침묵. 우리는 인물을 통해 그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인물은 허구다. 작가는 결과를 통제한다. 현실은 통제되지 않는다. 허구의 선택을 현실의 기준으로 그대로 옮기면 충돌이 생긴다. 

 

그래서 동일시는 두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깊이 따라간다. 둘째, 한 발 떨어진다. 따라가지 않으면 문학은 살아나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으면 독자는 인물에 흡수된다.

 

결국 인물 동일시는 인간 사고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야기로 배우고, 이야기로 판단한다. 문학은 인간을 넓힌다. 동시에 방향을 조정한다. 인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을 검토해야 한다.

 

문학은 스스로를 이야기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생각의 이동 통로다. 노골적인 선언 없이도 하나의 인간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그 인간형의 판단을 따라가게 하며, 끝내는 그 판단을 낯설지 않게 만든다. 

 

인물은 허구지만, 그 인물이 반복해서 보여준 선택과 태도는 독자의 내부에 축적된다. 그렇게 문학은 이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심는다. 명제 대신 인물을, 논증 대신 체험을 내세워 사상을 운반한다. 가장 오래 남는 생각은 설명이 아니라 함께 살아본 사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물 동일시는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사상의 침투 경로다. 우리는 등장인물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인물의 논리를 일정 부분 승인하고 있다. 문학은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기준을 바꾼다. 

 

그래서 독자는 언제나 두 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인물과 함께, 또 한 번은 그 인물이 어디로 나를 이끌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인물을 통해 사유하되, 인물에게 사유를 맡기지 않아야 한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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