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멕베스’(1971) 포스터.
문학은 인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그런데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 안에는 상반된 욕망이 공존한다. 선의와 계산, 연민과 무관심, 책임과 회피가 동시에 자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사는 갈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인물을 둘로 나누는 방식을 택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정의와 불의, 저항과 억압. 이 구도는 이해하기 쉽고, 독자의 감정을 빠르게 조직한다. 그러나 이 간명함은 대가를 요구한다. 인간의 복잡성이 잘려 나간다.
복잡한 관계를 둘로 나누는 기술
가해자의 단순화는 보통 “도덕적 속도전”에서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독자는 빠른 판단을 원한다. 누가 잘못했는가?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 작가는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물을 명확히 배열한다.
악한 자는 일관되게 악하게, 피해자는 일관되게 순수하게. 이 구조는 갈등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제거한다. 왜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는가? 어떤 조건이 작동했는가? 그 인물은 어떤 관계망 속에 있었는가? 같은 질문은 뒷전으로 밀린다.
문학사에서 비극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보자. 맥베스는 살인자다. 그러나 그는 단지 “악한 인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야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린다. 예언의 유혹, 아내의 압박, 왕권에 대한 갈망, 자신의 나약함이 얽힌다.
독자는 그를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하려 한다. 이 긴장 속에서 작품은 깊이를 얻는다. 만약 맥베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갈등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도덕극에 머물렀을 것이다.
복잡한 관계를 둘로 나누는 기술은 인물을 기호로 만든다. 기호는 빠르게 읽히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기호는 설명하지 않고 지시한다.
“이 인물은 가해자다.”
이렇게 발화되는 순간 독자의 사유는 멈춘다. 더 이상 그 인물의 동기를 추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은 기호가 아니라 인간을 다루어야 한다. 인간은 모순을 가진 존재다. 모순을 제거하면 현실도 사라진다.
특히 사회적 폭력을 다루는 작품에서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전쟁, 학살, 정치적 탄압을 다룬 작품에서 가해자를 단순화하면 독자는 안도한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폭력은 몇 명의 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직, 제도, 언어, 선전, 침묵이 결합한다. 문학이 이를 외면하면 현실에 대한 이해도 얕아진다.
둘로 나누는 기술은 독자의 감정을 빠르게 조직한다. 그러나 감정이 곧 이해는 아니다. 이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는 모순을 견디는 힘을 요구한다. 가해자를 단순화하는 순간, 우리는 그 힘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얻게 되는 것은 도덕적 확신뿐이다.
문학의 과제는 확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열어 두는 것이다. 가해자의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가 속한 세계가 어떤 구조였는지, 그의 침묵이나 순응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을 버리지 않을 때 문학은 인간을 온전히 다룰 수 있다.
복잡함을 둘로 나누는 기술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 매혹을 경계해야 한다. 복잡함을 유지하는 일, 그 속에서 인물의 선택을 추적하는 일, 책임의 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힘이다.
악을 평면화하면 깊이가 제거된다
악을 평면으로 만드는 것은 깊이를 제거하는 일이다. 평면 위의 인물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그는 나쁜 선택만을 한다. 그의 언어에는 흔들림이 없고, 그의 내면에는 갈등이 없다. 이런 인물은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만큼 인간적이지 않다.
문학에서 악의 평면화는 종종 “괴물 서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해자는 인간 범주 밖으로 밀려난다. 그는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다. 독자는 그를 통해 안심한다. “나는 저렇지 않다.”
그러나 이 안심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독자는 자신과 이야기의 거리를 확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악은 저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 이러면 문제는 끝난다.
그러나 많은 위대한 작품은 이 거리를 허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그는 사상적 오만과 가난, 자존심과 좌절 사이에서 흔들린다.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동서문화사
독자는 그를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내면을 따라가게 된다. 이 따라감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악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직면한다.
악을 평면화하면 구조가 사라진다. 개인의 잔혹성만 남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환경은 보이지 않는다. 문학은 환경을 드러내야 한다. 제도, 언어, 관습, 권력관계.
악은 진공 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악은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이 맥락을 제거하면 작품은 도덕적 선언문이 된다.
또한 악의 평면화는 피해자를 신성화한다. 피해자가 완전히 순수한 존재로 그려질수록 가해자는 더욱 납작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그렇게 나뉘지 않는다. 피해자 역시 다른 관계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복잡성을 문학이 외면하면, 인간은 상징으로 축소된다.
악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독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연결을 느끼기 때문이다. 악이 낯설지 않을 때, 우리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면 문학은 안전해진다. 그러나 안전한 문학은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
설명이 사라진 세계의 편안함
설명이 사라지면 세계는 단순해진다. 이유는 하나로 정리되고, 책임은 한쪽으로 몰린다. 독자는 빠르게 감정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 이런 세계는 편하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얕다.
설명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반복을 막을 수 없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면, 다시 벌어질 가능성도 보지 못한다. 문학은 반복을 막기 위한 기억의 장치다. 그러나 기억이 설명을 대신하면 기억은 도구가 된다. 감정을 조직하는 수단이 된다.
문학은 설명을 복원해야 한다. 단순한 분노를 넘어, 사건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명은 불편하다. 설명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설명이 있어야 책임도 정확해진다.
설명이 살아 있는 작품은 독자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는 인물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갈등의 배경을 살핀다. 그는 침묵의 의미를 읽는다. 이런 독자는 현실에서도 단순한 구호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결국 가해자의 단순화를 거부하는 일은 인간을 존중하는 일이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책임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더 정교하게 만든다. 복잡함을 견디는 힘이야말로 문학이 길러야 할 감각이다.
문학은 세계를 선과 악 둘로 나누는 기술을 넘어야 한다. 복잡함을 유지하고, 깊이를 살리고, 설명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인간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는 언제나 단순한 분노보다 강하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