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토쿠장의 쌀 소주 캄바시. 파인애플 같은 풍미의 25도 소주다. [사진=CANBASY]규슈를 여행하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역을 조금만 옮겨도 술이 달라진다. 후쿠오카와 사가에서는 청주가 강하고, 오이타와 나가사키의 이키에서는 보리소주가 유명하다.
구마모토에는 쌀소주와 아카자케가 있고, 미야자키와 가고시마로 내려가면 고구마소주가 주인공이 된다. 아마미에는 흑당소주, 오키나와에는 아와모리가 있다.
일본 어디에서나 술을 만들지만 규슈만큼 다양한 술 문화가 한 지역에 모여 있는 곳도 드물다. 여기에는 규슈의 지리와 기후, 농작물, 물, 그리고 오랜 대외교류의 역사가 있다.
일본의 술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일본의 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몬(縄文)시대까지 닿는다. 조몬시대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은 술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야생 포도나 다래 같은 과실을 발효시킨 음료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본격적인 변화는 야요이(弥生)시대에 일어났다. 야요이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벼농사였고, 일본에서 그것이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이 북부 규슈였다.
쌀 생산지로 알려진 아사쿠라의 여름 풍경에 꼭 등장하는 삼련 물레방아(三連水車). 실동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물레방아다. [사진=후쿠오카 관광청] 쌀이 들어오면서 쌀을 이용한 발효와 양조문화도 발전할 조건이 마련됐다. 3세기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에 왜인들이 장례 등의 행사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술은 이미 공동체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고분시대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응신(応神)천황 때 백제에서 온 것으로 전해지는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술을 빚어 천황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고대 일본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양조기술을 중요한 외래문화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처음 술은 주로 왕궁과 신사, 사원에서 제사와 연회를 위해 만들었다. 그러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도시와 상업이 성장하면서 전문 양조업자가 나타났고 술도 본격적인 상품이 되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술 소비는 더욱 늘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어지러운 세상이 되면 술로 고통을 푸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던 모양이다.
후쿠오카: 규슈 술의 북쪽 관문
후쿠오카에서도 하카타(博多)는 한반도와 중국을 향해 열린 국제무역항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상품, 기술이 들어오는 곳이었고 벼농사와 좋은 물까지 갖춰 청주문화가 일찍 발달했다.
1673년 창업한 오가주조(大賀酒造)는 후쿠오카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치쿠시노(筑紫野)시 후쓰카이치(二日市)에 있다. 대표적인 청주가 다마데이즈미(玉出泉)다. 구루메(久留米), 조지마(城島), 이토시마(糸島) 등에도 전통적인 양조장이 이어지고 있다.
1673년 창업한 오가주조(大賀酒造)의 대표적인 청주 다마데이즈미(玉出泉). [사진=오가주조]오이타: 보리로 술을 만들다
오이타(大分)를 대표하는 술은 무기쇼추(麦焼酎), 즉 보리소주다. 원래 청주문화도 강했지만 오늘날에는 보리소주가 오이타의 얼굴이 됐다.
오이타에는 예전부터 보리와 보리누룩을 이용하는 발효문화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현대적인 보리소주 산업이 성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1866년 창업한 히지마치(日出町)의 니카이도주조(二階堂酒造)다.
사가: 쌀과 물이 만든 청주
사가(佐賀)는 규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다. 넓은 사가평야에서 좋은 쌀이 생산되고 세후리(背振)산지와 덴잔(天山) 일대에서 좋은 물을 얻을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청주가 발달했다.
에도시대에는 양조업이 크게 성장해 사가시를 비롯해 가시마(鹿島), 우레시노(嬉野), 가라쓰(唐津), 이마리(伊万里), 아리타(有田) 등에 많은 양조장이 자리 잡았다. 특히 가시마는 지금도 전통적인 사케 산지로 유명하다.
나가사키: 바다가 만들어낸 술
나가사키(長崎)의 술을 이해하려면 바다를 봐야 한다. 쓰시마와 이키(壱岐), 고토열도를 품은 나가사키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중국, 동중국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특히 이키는 일본 보리소주의 중요한 고향이다. 이키쇼추는 보리를 주원료로 하면서 쌀누룩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오이타의 보리소주와도 맛이 다르다. 고토열도(五島列島)에서는 고구마소주도 생산한다. 그래서 나가사키에서는 청주와 보리소주, 고구마소주가 함께 존재한다.
구마모토: 물이 술맛을 만든다
구마모토(熊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이다. 아소산 일대에 내린 비가 화산지층을 통과해 지하수가 되고 곳곳에서 솟아난다.
지리적 표시(GI) 제품으로 인정받은 구마 쇼추. [사진=구마모토 관광청]구마모토에는 아카자케(赤酒)라는 독특한 전통술도 있다. 붉은빛을 띠고 단맛이 있으며 정월 행사와 요리에도 사용하는 향토주다. 구마모토에서 개발·보급된 효모와 양조기술은 근대 일본 긴조슈(吟醸酒)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남쪽 히토요시(人吉)와 구마(球磨) 지방으로 가면 쌀을 증류한 구마쇼추(球磨焼酎)가 유명하다. 같은 쌀인데 사가에서는 청주가 되고 구마에서는 소주가 되는 것이다.
미야자키와 가고시마: 고구마소주의 나라
남규슈로 내려가면 술의 주인공이 고구마로 바뀐다. 따뜻한 기후와 화산성 토양을 가진 미야자키(宮崎)와 가고시마(鹿児島)에서는 고구마 재배가 활발했고 자연스럽게 고구마소주가 발달했다.
대표적인 술이 구로기리시마(黒霧島)와 사쓰마시라나미(さつま白波)다. 미야자키에서는 고구마뿐 아니라 보리, 쌀, 메밀 등 여러 원료를 이용한 소주도 생산한다.
더 남쪽의 아마미군도(奄美群島)에서는 흑설탕과 쌀누룩을 이용한 고쿠토쇼추(黒糖焼酎), 즉 흑당소주가 만들어진다.
오키나와: 아와모리의 세계
오키나와(沖縄)로 내려가면 술 문화가 다시 달라진다. 대표적인 술이 아와모리(泡盛)다.
주로 태국산 인디카쌀과 흑누룩을 사용하고 도수도 대체로 25~40도 정도로 높은 편이다. 오키나와가 오랫동안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교역권에 있었다는 역사가 술에도 남아 있다.
규슈에는 왜 술이 이렇게 많은가?
규슈의 술 지도를 펼쳐보면 답이 보인다.
후쿠오카·사가에는 청주, 오이타·이키에는 보리소주, 구마모토에는 아카자케와 쌀소주, 미야자키·가고시마에는 고구마소주, 아마미에는 흑당소주, 오키나와에는 아와모리가 있다.


규슈의 도가들과 지역 술. [사진=박명미 작가] 북부에는 벼농사에 적합한 평야가 있고 남부에는 따뜻한 기후와 화산성 토양이 있다. 중앙의 아소산과 남쪽의 기리시마, 사쿠라지마 같은 화산지대는 때때로 큰 피해를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지하수를 제공한다.
지역마다 생산되는 농작물도 달랐다. 쌀이 많은 곳에서는 청주와 쌀소주가, 보리가 많은 곳에서는 보리소주가, 고구마가 잘 자라는 곳에서는 고구마소주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바다가 있었다. 규슈는 한반도와 중국에 가까우며 남쪽으로는 류큐열도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이어진다. 사람과 함께 벼농사와 발효기술, 누룩과 증류기술, 새로운 작물이 들어왔다. 규슈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지역의 농산물과 물, 기후에 맞게 바꾸었다.
그래서 규슈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함께 마시는 일이다.
후쿠오카의 청주에는 북부 규슈의 벼농사와 하카타의 교역 역사가 있고, 이키의 보리소주에는 섬사람들의 생활이 있다. 구마모토의 쌀소주에는 아소산의 물이 있고, 가고시마의 고구마소주에는 사쓰마의 화산성 땅이 있다. 아마미의 흑당소주와 오키나와의 아와모리에는 동중국해를 오가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규슈에 전했다. 오늘날에는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의 관광객들이 규슈에서 사케와 쇼추, 아와모리를 맛보고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남의 것을 내 것처럼 누리고, 내 것을 남들이 제 것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세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디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술맛은 땅의 맛이고 물의 맛이며, 그곳을 오갔던 사람들의 역사다. 규슈에 술 종류가 많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 박명미 작가
일본 미식 여행 칼럼니스트. 이화여자고등학교 졸업, 일본 구마모토대학교 대학원 졸업(언어학 전공), 사가대학교·규슈산업대학교 한국어 강사. 저서로 한·일어 비교 연구서 ‘아나타는 한국인’(공저, 200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