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Ⅱ부. 불신은 어떻게 확산되고 고착되는가 (6~10편)
⑥ 언론, 불신을 설명하지 못한 중재자
⑦ 정치, 선택 없는 말의 정치
⑧ 경제, 숫자는 많아졌는데 신뢰는 사라졌다
⑨ 교육,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할 제도의 붕괴
⑩ 노동, 보호가 아니라 위험이 된 제도
정치는 선택의 영역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며, 어떤 가치를 우선하겠다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감수하겠다는 책임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에서 이 선택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정치의 공간은 말로 채워진다. 방향을 제시하는 선언, 의지를 강조하는 수사, 포괄적 가치를 나열하는 연설이 반복된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을 수 있지만, 선택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준이 명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 없는 말의 정치는 우연히 등장하지 않았다. 불신 사회에서 정치가 적응한 결과다.
어떤 선택을 하든 비판이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환경에서, 정치 권력은 판단을 분명히 하기보다 판단을 유예하는 언어를 선택한다. 말은 남기되, 선택은 기록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 구조에서 실패는 설명되지 않는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과거의 선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는 외부 요인으로 전가되거나, 의도와 다른 결과로 정리된다. 정치는 잘못을 고치기보다 서사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정치가 선택을 숨길수록, 책임은 흐려진다. 책임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윤리적 비판도 힘을 잃는다.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정치적 논쟁은 정책의 우열이 아니라, 발언의 해석 경쟁으로 변한다.
선택 없는 말의 정치는 시민의 행동도 바꾼다. 시민은 더 이상 정치의 약속을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
대신 말의 진정성을 가늠하거나, 발언의 숨은 의도를 추정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정치는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 불신은 심화된다. 그러나 이 불신은 냉소라기보다 학습의 결과다.
선택이 기록되지 않는 정치에서, 시민이 믿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선택의 근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의 통치력은 법적 권한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복 가능한 기준에서 나온다.
오늘의 정치가 이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수록, 통치력은 점점 약화된다. 국가는 존재하지만, 정치의 방향은 사후 해석에 맡겨진다.
이 구조는 언론의 기능 상실과 결합해 더 강해진다.
언론이 선택의 기록을 정리하지 못할수록, 정치의 말은 더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진 말은 책임에서 멀어지고, 책임에서 멀어진 말은 다시 불신을 키운다.
선택 없는 말의 정치는 혼란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안정은 책임을 유예한 결과일 수 있다. 장기적으로 사회는 어떤 판단이 반복되었고, 어떤 선택이 실패했는지를 학습하지 못한다.
정치가 다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다.
선택을 드러내는 구조다.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포기했으며,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가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실패를 수정할 수 있다.
선택 없는 말의 정치는 책임을 남기지 않는다.
정치가 기능을 잃는 순간은 거짓을 말할 때가 아니라, 선택을 기록하지 않을 때다.
다음 편(⑧ 경제, 숫자는 많아졌는데 신뢰는 사라졌다)에서는 정치의 언어를 넘어, 기대 관리에 실패한 경제 정책이 어떻게 불신을 확대했는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