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신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선택이 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대안이 있었으며, 왜 그 선택이 내려졌는지를 복원할 수 없을 때, 사회는 스스로를 수정할 능력을 잃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각자도생 사회는 혼란의 결과가 아니었다.
언론은 중재 기능을 잃었고, 정치는 선택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경제는 기대를 관리하지 못했고, 교육과 노동은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했다.
그 결과 개인은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사회는 공동의 판단 구조를 상실했다.
이 지점에서 흔히 등장하는 해법은 ‘신뢰 회복’이다. 그러나 신뢰는 선언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뢰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는 불신 사회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불신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대신 필요한 것은 불신이 존재해도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 조건이 바로 구조화된 기록이다.
구조화된 기록이란 단순한 문서화가 아니다. 결과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경로를 남기는 기록이다.
어떤 문제 인식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선택지가 검토되었는지, 어떤 기준으로 하나의 선택이 채택되었는지를 연결된 형태로 남기는 것이다.
이 기록은 책임을 즉각적으로 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처벌이나 단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구조화된 기록의 목적은 수정 가능성이다. 잘못된 선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다.
중요한 점은 이 기록이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판단이 옳을 수는 없다. 오히려 잘못된 판단이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의 이유가 기록되지 않을 때, 사회는 같은 실패를 다른 이름으로 반복한다. 반대로 실패가 구조적으로 남아 있을 때, 사회는 그 실패를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구조화된 기록은 민주주의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시민이 항상 합리적일 것이라는 가정도 하지 않는다.
대신 민주주의를 하나의 학습 시스템으로 다시 정의한다. 잘못된 선택을 수정할 수 있는가, 그 수정의 근거가 남아 있는가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른다.
AI 시대에 이 조건은 더욱 중요해진다.
AI는 판단을 빠르게 제시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의 이유를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다. 판단을 기록하지 않는 사회에서 AI는 편리한 대체물이 된다.
그러나 판단을 기록하는 사회에서 AI는 보조 도구로 제한된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의 문제다.
각자도생 사회의 치명적 약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은 학습하지만 사회는 학습하지 못한다. 이유는 공동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구조화된 기록이 없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조용히 기능을 상실한다. 투표는 남아 있지만, 수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구조화된 기록은 정책 도구가 아니라 문명 인프라다.
언론의 기사 작성 방식, 정치의 결정 기록, 행정의 정책 설계, AI 시스템의 로그 구조까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가 남아야 한다.
신뢰는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남길 수 있다.
판단의 경로가 기록된 사회는 불신 속에서도 작동한다. 불신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불신을 관리하는 사회만이 민주주의를 연장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신뢰로 유지되지 않는다. 판단의 경로가 기록될 때, 민주주의는 불신 속에서도 학습할 수 있다.
시리즈를 마치며
[불신의 시대]는 신뢰 회복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불신이 축적된 사회가 어떻게 작동을 멈추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다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추적했다.
그 출발점은 언제나 같다.
기록이 구조화될 때, 선택은 다시 사회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