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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과 통혁당’ ④ 지령과 보고 그리고 돈 [특별기고: 松山]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02 21: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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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당의 요건… 지령·보고·돈 그리고 상
  • 통혁당 간부 구출 위해 北 무장공작선 띄워
  • 북한, 김종태에 북한 최고훈장 금성메달 수여

신영복은 북한 핵을 두고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북한이 경제 문제에 전력투구할 조건을 만들려는 협상용 성격”이 핵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통일혁명당(통혁당)을 ‘남한 내부의 자생적 운동’으로 보면, 문서에 남아 있는 숫자와 훈장, 그리고 작전의 형태가 설명할 길이 없다. 

 

장비와 공작금 수준, 지하당 확실해

 

통혁당 사건을 정리한 문서에는 △검거 158명 △송치 73명이라는 수치가 등장한다. 동시에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 △권총 7정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다 1대 △라디오 수신기 6대 같은 압수 목록이 함께 적힌다. 

 

현장에서 압수된 자금으로는 미화 3만여 달러, 한화 73만여 원이 제시된다. 이것은 동아리 수준의 모임과 거리가 멀다. 조직이 ‘지하당’의 형태로 굴러갔다는 뜻이다. 

 

지하당을 지하당으로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는 지령과 보고다. 둘째는 돈이다. 

 

통혁당 수괴로 지목된 김종태는 간첩 김수상과 접촉하고, 전남 신안군 임자도 경로를 거쳐 배편으로 북한을 전후 네 차례 왕래한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들여온 자금으로 ‘청맥’을 발간했다는 공소사실도 부인하지 않았다. ‘잡지를 찍어내는 돈’은 곧 ‘조직이 숨 쉬는 공기’다. 

 

또 하나의 단서가 북한이 사후에 내린 ‘상’이다. 주범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된 날짜는 1969년 7월10일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 뒤 북한이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를 내리고, 북한 최고훈장으로 알려진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했다. 

 

1968년 11월 통혁당 재판 당시 사건 관련자들. 피고인석 앞줄 맨 오른쪽이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이다. 

한국통일연구원(KINU) 자료에서도 김종태 사형 집행 이후 북한이 추도와 영웅칭호, 훈장 수여를 진행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북한 체제에서 훈장은 “체제 기여”의 공식 인정이다.

 

제주 무장공비 사건과 통혁당 구출 시도

 

지하당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구출 작전’이다. 통혁당 사건이 터진 뒤, 북한은 “끝났다” 하고 손을 떼지 않았다. 

 

1968년 8월20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북한 제753부대 제51호 무장간첩선이 접근했다. 승선 인원은 14명이었다. 

 

정박 지점은 서귀포시 서홍동 남성해안(속칭 황우지)에서 약 500m 떨어진 해상. 고무보트로 안내원 2명을 먼저 들여보내 공작원 이문규와 접선한 뒤 복귀하려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1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됐다. 공작선은 다음날 새벽 격침됐다. 월간조선은 이 사건을 “통혁당 핵심간부 구출을 위해 북한이 보낸 무장공작선”의 맥락에서 다루면서, 북한이 제주 서귀포 해안으로 공작선을 보낸 것을 군·경·정 합동작전으로 나포한 것이라고 썼다. 

 

‘간첩선 침투 사건’과 ‘통혁당 사건’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시점이 통혁당 검거 직후로 맞물리고, 접선 대상이 통혁당 관련 인물이며, 작전 형태가 무장침투다.

 

제주 사건을 북괴의 ‘단순한 정찰’로만 얼버무리면 안 된다. 단순한 정찰이라면 소규모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무장 공작원 14명, 공작선, 고무보트, 접선, 철수 계획까지 갖추고 있었다. 

 

‘주암산’ 통해 밝혀진 조직의 성격

 

정부 기관의 발표나 언론 보도는 늘 ‘정치적 편향’이라는 반론을 부른다. 그래서 주목할 것은 통혁당 내부자의 증언이다. 

 

통혁당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김질락의 옥중 유고 ‘주암산’은 통혁당을 “북한 지령을 받은 비밀 지하당”으로 규정하는 문장이 있다.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취지의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통혁당은 ‘남한의 자생’ 조직이 아니라 ‘북한과의 연결’ 조직이었다. 신영복이 출옥 후 늘 떠벌렸던‘개인의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주 빠지는 대목이 있다. 지하당은 이념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조직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합법과 비합법의 이중 구조, 사람을 모으는 서클, 잡지라는 외피, 기관지라는 속살, 자금줄, 접선, 은신처, 필요하면 무장침투까지. 

 

통혁당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당시 서울 무교동의 ‘학사주점’이 청년 엘리트들의 단골 공간으로 언급되고, ‘청맥’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는 정황이 적혀있다. 

 

또 구속 기소 인원이 39명에 이르렀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런 사회적 외피가 있어야 지하당은 “섞여 들어간다”. 겉으로는 토론이고, 속으로는 북한의 노선과 북으로의 보고 조직이었다. 적어도 ‘발각되기 전까지’ 정상적인 지하당이었다.

 

출옥 후에도 변함없는 반미·반자본주의 발언들

 

신영복을 둘러싼 논쟁은 대개 ‘과거(통혁당)’에서 멈춘다. 그러나 대중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준 시기는 오히려 출옥 이후다. 

 

그는 1988년 출소한 뒤(특별가석방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듬해인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2006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이어 갔다. 

 

강단과 출판은 사람을 새롭게 만든다. 지하의 조직 활동은 숨을 곳이 필요하지만, 강단과 책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리고 그 빛이 밝을수록, 과거의 기록은 더 빨리 사라진다.

 

출옥 이후 그가 남긴 핵심 인식은 두 줄로 요약된다. 미국을 ‘분단 체제의 설계자’로 규정하는 반미 인식, 그리고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반자본주의 성향이다. 

 

이 둘은 별개의 취향이 아니라 서로 기대는 쌍둥이였다. 미국을 문제의 뿌리로 놓으면,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 역시 “미국이 만든 하위 구조”로 설명하기 쉬워진다.

 

실제 발언으로 확인되는 대목이 있다. 

 

여러 매체가 인용하는 신영복 발언에는 “미국이 한국의 은인이라는 환상을 청산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또 미국이 “친미적 분단정권을 창출”했고 “미국경제의 하위 경제구조를 편성”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역사 해석의 한 입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한국 현대사를 설명하는 한 축을 통째로 바꾸는 시도다. 즉 원인과 책임의 방향이 “북한의 선택과 행동”이 아니라 “미국의 설계”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공감이 있는 한 역사에서 계속 살아남을 것”


반자본주의 성향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영복은 1996년 8월 ‘월간 말’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적 시도가 실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의 긍정성에 대한 공감이 있는 한 그 장점은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단순한 비판적 성찰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뒤에도 사회주의의 ‘긍정성’을 핵심 자산으로 남겨 두는 태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문학자 신영복’의 이미지와 ‘정치적 신념’이 분리되지 않는다. 신영복의 말은 곧 그의 노선이다.

 

출판의 연도도 중요하다. 그가 ‘마지막 강의’로 정리해 낸 ‘담론’은 돌베개에서 2015년 4월에 출간(발행일 표기는 4월20일, 4월27일 등으로 표기처가 갈리지만 2015년 4월 출간 자체는 일치한다)됐다. 

 

출간 시점은 박근혜정부 시절이다. 그때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피고인”이 아니라 “원로 지성”으로 유통되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서점 문구는 “위로와 격려” 같은 정서적 언어를 앞세웠다. 

 

정서를 앞세우면, 독자는 사실의 기록에 무관심하게 된다. “좋은 글”은 독자의 경계심을 무장해제한다. 그 결과 반미·반자본주의 인식은 ‘주장’이 아니라 ‘품격’처럼 포장되었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신영복의 반미 종북적 인식은 “한때 그랬다”가 아니다. 강단(1989~)과 출판(1990년대~2015년)을 통해 장기간 반복 노출되었다. 

 

반복 노출은 사상을 설득하는 가장 강한 기술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 머릿속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자동 반응을 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사실은 정치 연설보다 훨씬 오래 간다.

 

북한 핵에 대한 시선… 현실 부정과 책임 전가

 

신영복의 반미 인식은 북한 핵 문제를 바라보는 틀에서도 나타난다. 핵을 ‘침략 준비’나 ‘공격 의지’로 보기보다, ‘체제 보장’과 ‘협상 카드’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신영복은 북한 핵을 두고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북한이 경제 문제에 전력투구할 조건을 만들려는 협상용 성격”이 핵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또 북한 핵을 “정치지도자의 야심”이나 “정치적 오판”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북핵은 북한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무장을 한 주체는 북한인데, 원인과 동력은 미국의 전략과 국제 질서로 옮겨버리는 논리다. 그러면 북한의 선택은 ‘원인’이 아니라 ‘반응’이 된다.

 

반응으로 설정된 행위는 도덕적 비판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무엇을 했는가가 흐려지고, 대신 “어쩔 수 없었다”는 정서를 신영복은 남겨놓았다.

 

신영복식 설명의 더 큰 문제는 ‘미국 책임론’이 자동으로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신영복은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북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틀이 짜이면, 북한의 핵실험 6회(2006~2017)는 ‘원인’이 아니라 “반응의 연속”이 된다. 그 순간부터 비판은 방향을 바꾼다. 핵실험을 멈추게 만드는 압박과 억지의 논리가 약해지고, 대신 “미국이 바뀌면 북한도 바뀐다”는 기대가 남는다.

 

이런 기대는 1990년대 이후 실제 외교 과정과도 어긋난다.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자는 주장은 오래된 외교 의제였고(남북기본합의서 등에서도 ‘평화체제 전환’이 언급된다), 그 자체만으로 친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평화체제”라는 단어가 핵무장의 정당화 장치로 쓰일 때다. 핵실험을 6차례나 거친 국가에게 “경제에 전력투구할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한 핵”이라는 설명을 붙이면, 핵은 범죄가 아니라 정책이 된다. 정책이 되면, 책임을 물을 수가 없게 된다.

 

인신공격이 아닌 기록에 근거한 비판

 

신영복은 1988년 출옥 이후 침묵하거나 과거와 단절하지 않았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 강단에 섰고, 이후 교수와 원로 지성의 위치로 이동했다. 2015년 ‘담론’은 그 이동의 종착지였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무엇을 끝내 정리하지 않았느냐에 있다.

 

반미 인식은 “은인 환상 청산”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되었다. 이는 미국을 한국전쟁, 안보, 원조의 맥락에서 도덕적 은인으로 인식하는 틀을 허구로 규정하고, 그 인식 자체를 제거하자는 주장이다. 이 표현은 중립도 분석도 아니다. 

 

과거의 노골적 반미 구호를 지식인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급진적 정치 입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교양 담론의 외피를 썼다.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96년 인터뷰에서 확인되는 태도는 단절이나 반성이 아니라, 긍정성을 남겨두는 유보였다. 

 

실패한 체제에 대한 분명한 평가 대신, 가능성과 이상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사상을 보존했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신념을 유지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같은 시기 현실은 냉혹했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은 여섯 차례 핵실험을 감행했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위협으로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의 언어는 이 현실을 분명한 평가의 장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사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은 정리되지 않았고, 해소되지도 않았다. 그 긴장은 방치된 것이 아니라, 끝내 유지되었다.

 

이 지점이 비판의 핵심이다. 신영복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변형되었다. 조직의 언어는 강단의 언어로, 강단의 언어는 책의 언어로, 책의 언어는 대중 정서로 이동했다. 투쟁은 성찰로, 혁명은 담론으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방향은 유지되었고, 책임은 지워졌다.

 

따라서 신영복을 둘러싼 문제는 “사상이 남아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신영복의 사상은 끝내 청산되지 않은 채, 존경스러운 신화적 언어로 재포장되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결과 신영복의 정치 사상은 해체되지 않은 채, 교양과 고고한 도덕의 얼굴로 대한민국 사회에 버젓이 잔존해 있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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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이미지
    lsgvvv22026-02-03 00:05:48

    저런 종북좌파 신영복을 박근혜 이명박은 구속하지 못하고 뭐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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