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재판정에 선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 [국민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감옥은 종북 좌파에게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훈장 공장이었다.
조직도 무너졌고, 간부도 잡혔고, 노선도 실패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이후 핵심 조직은 사실상 해체됐다. 김종태는 1969년 사형당했고, 김질락·이문규·최영도 등 주요 인물도 줄줄이 유죄를 받았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까지 이어지며 지하 혁명 노선은 계속 적발됐다. 겉으로 보면 완패였다.
그런데 1970년대 종북 좌파는 이 연속된 실패를 실패로 남겨두지 않았다. 감옥을 정치학교로 만들고, 수형 기록을 도덕 자산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1970년대 종북 좌파의 생존 기술이 만들어졌다.
1960년대 말까지 운동권 내부에서 감옥은 원래 실패의 증거였다. 잡혔다는 것은 보안에 실패했다는 뜻이고, 조직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혁명 조직에서 검거는 영웅담이 아니라 사고였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이 인식이 바뀌었다. 잡힌 사람은 무능한 간부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희생자”로 재해석됐다. 이 변화는 우연히 생기지 않았다. 조직이 연속으로 무너지자,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면 운동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으려면 패배의 의미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감옥은 실패의 현장이 아니라 신념의 증거로 다시 포장됐다.
이 작업은 통일혁명당 사건 이후 본격화됐다. 1968년 8월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관련자 158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73명이 기소됐고, 김종태를 포함한 핵심 간부들이 중형을 받았다. 조직은 사실상 끝났다.
그런데 운동권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노선 실패”로 정리하지 않았다. 대신 “민주주의를 요구한 세력을 국가가 탄압했다”는 식으로 기억을 바꿨다. 북한 연계와 지하당 조직 건설이라는 핵심은 뒤로 숨겨졌고, 내세운 것은 탄압 서사였다. 여기서 첫 번째 수감 서사가 만들어졌다. 감옥에 갔다는 사실이 곧 정당성의 증거가 되기 시작했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이 수감 서사를 폭발적으로 키운 계기였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던 중 인혁당 재건 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우홍선, 이수병, 서도원, 김용원, 여정남 등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고, 판결 18시간 만인 4월9일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이후 운동권 전체의 상징 자산이 됐다. 종북 좌파는 이 사건을 통해 “국가가 사람을 죽였다”는 강력한 피해 서사를 확보했다. 여기서부터 감옥은 억울함의 공간이 됐고, 수형자는 혁명 실패자가 아니라 국가폭력 생존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 변화는 학생운동권에 특히 강하게 퍼졌다. 197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는 “잡혀간 선배”가 이론 교재보다 더 강한 교육 자료가 됐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학생운동 조직은 검거자 수기와 옥중 편지를 돌려 읽었다.
불법 인쇄물은 대개 세 가지를 담았다. 체포 과정, 조사실 경험, 수감 생활이 그것이다. 이 글들에 ‘조직 실패’는 씌어있지 않았다. 대신 고문, 독방, 신념, 버팀을 강조했다. 핵심은 “왜 잡혔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견뎠는가”였다. 노선 검토는 사라지고, 고난의 서사만 남았다. 이때부터 학생운동은 이념보다 순교 문법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수감 경험은 운동권 내부의 신분 자본이 됐다. 흔히 “전과”는 사회에서 불이익이지만, 운동권 내부에서는 반대였다. 구속 경력은 검증된 이력으로 통했다. 누가 더 오래 버텼는가, 누가 더 심한 조사를 견뎠는가, 누가 전향서를 쓰지 않았는가가 내부 위계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이 시기 운동권에서 “몇 년 살았다”는 말은 단순한 형량 소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충성도 증명서였다. 감옥은 경력 세탁소가 아니라 경력 증명서 발급소가 됐다.
1980년 2월4일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관련 피고인 73명에 대한 첫 공판이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남민전의 전사’로 불리던 시인 김남주. [사진=김남주기념사업회]
이 문화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서 더 분명해졌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이른바 남민전은 1976년 결성돼 1979년 적발됐다. 이재문, 안재구, 김남주 등이 연루됐고, 전국에서 80여 명이 검거됐다. 검찰은 반국가단체 성격과 무장 준비 정황을 제시했다.
그러나 운동권 내부 기억은 달랐다. 무장 노선의 위험성과 조직 판단 실패는 숨겨졌고, “독재에 맞선 지식인 탄압”만 남았다. 남민전 역시 실패한 지하조직이 아니라 탄압받은 저항조직으로 다시 편집됐다. 여기서 감옥은 다시 한 번 패배 세탁소 역할을 했다.
이 수감 서사는 개인의 자서전에서도 빠르게 굳어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 출신 회고록, 수기, 유인물에는 비슷한 문법이 반복됐다. “끌려갔다” “버텼다” “꺾이지 않았다” “다시 나왔다”는 식의 표현이 중심을 이뤘다.
그런데 정작 빠진 것이 있었다. 왜 조직이 실패했는가, 왜 대중은 호응하지 않았는가, 왜 북한식 혁명론이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했는가 같은 질문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감옥 이야기는 많았지만 실패 분석은 없었다. 수감은 길게 과장되었고, 실패는 짧게 기술되었다.
이 방식은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했다. 실패한 혁명가는 위험하지만,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피해자는 도덕 권위를 쉽게 얻었다. 종북 좌파는 이 점을 정확히 알았다. 감옥은 조직 실패를 가리는 방패였고, 대중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가장 쉬운 증거였다.
“나는 감옥에 갔다”는 말 한마디는 사상과 노선 검증을 건너뛰게 만들었다. 무엇을 했는가보다 얼마나 당했는가가 앞에 섰다. 여기서 운동권의 오래된 습관이 굳었다. 노선은 틀려도, 고생했으면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습관이다.
1980년대 운동권은 바로 이 유산 위에서 커졌다. 1970년대 수감 서사는 1980년대 NL·PD 계열 모두가 공유한 공통 자산이 됐다. 감옥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정통성의 근거가 됐고, 구속은 낙인이 아니라 훈장이 됐다.
이것이 1980년대 학생운동이 “사상 검증”보다 “투쟁 경력”을 먼저 따지는 문화로 가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종북 좌파는 1970년대에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실패를 미화하는 기술만큼은 완성했다. 그들이 감옥에서 꺼내 온 것은 반성문이 아니라 훈장이었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