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자리를 깔고 녹음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가족 방문객. [사진=임요희 기자]
과거 부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드넓은 사유지에 개인 정원으로 꾸며놓고 초록을 즐겼다. 그만큼 숲과 나무는 인간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도심 속 공원은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여 사는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산소를 방출해 공기를 맑게 하며, 도심의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용산로 5가 2-1번지. 오랜 세월 이방인의 군사기지로 쓰이며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던 서울 용산의 ‘금단의 땅’이 일반시민에게 개방된 게 2025년 말의 일이다.
전체 규모 뉴욕 센트럴파크와 맞먹어
그중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부근의 용산어린이정원은 용산공원 예정지의 일부다. 이름이 어린이정원이라 자그마한 공원일 줄 알았는데 여의도공원(7만 평)보다도 넓은 9만 평짜리 대형 정원이다.
용산기지 내 야구장을 활용한 잔디밭. 축구장 10개 규모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다. [사진=임요희 기자]
어린이 방문객의 비중이 많은 것을 고려해 공원 측에서는 관내를 도는 전용카트를 운영한다. [사진=임요희 기자]
정부가 향후 조성할 용산공원이 90만 평이라고 하니 용산어린이정원은 맛보기라 할 것이다. 용산공원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103만 평)에 버금가는 규모가 된다.
신용산역에서 용산어린이정원으로 향하는 인도에는 근조화환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용산어린이정원 부지에 청년 및 신혼부부를 위한 대규모 공공임대주택 단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검토하면서 거센 논쟁이 일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부지는 1904년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통해 처음 일본군이 주둔한 데 이어, 광복 이후에는 주한미군 8군 사령부가 자리 잡으면서 약 80년간 미국 문화가 이식된 ‘서울 속의 작은 미국’으로 존재했다. 미국 역사가 250년이니 80년 용산 시절이란 미군에게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기간이리라.
현재 용산어린이정원으로 개방된 곳은 과거 미군 장교 가족들의 주거지였다. 미국 스타일의 단독주택과 정원, 전용 클럽 등을 갖춰 전형적인 미국 서부 서브어반(Suburban) 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용산어린이정원 16개 주요시설 가운데 새로 지은 것은 없다. 옛 미군장교 숙소를 리모델링했기에 전체적으로 이국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다. [사진=임요희 기자]
이곳 홍보관, 용산서가, 전시관, 기록관, 아트라운지 등 16개의 주요시설 가운데 새로 지은 것은 없다. 옛 미군장교 숙소를 리모델링했기에 여전히 이국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다.
결코 작지 않은 규모임에도 카페와 마켓, 갤러리 등 문화 공간이 잘 갖추어져 있고 건물마다 냉방장치가 빵빵하게 돌아가 땡볕에서 하염없이 걷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도 어린이 방문객의 비중이 많은 것을 고려해 공원 측에서는 관내를 도는 전용카트를 운영한다. 승차장은 종합안내센터 앞이고 수시 운행한다. 요금은 무료다.
실제 미군 가족의 주거 공간을 엿보다
너무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어 이곳에서 꼭 한 곳만 봐야 한다면 ‘기록관’을 추천한다. 기록관1은 용산기지에 실제 거주했던 미군 장교와 가족들의 주거 공간을 재현한 곳으로 침실, 거실, 서재 등을 당시 사용하던 그대로 꾸며 놓았다. 당장 오늘 저녁 누군가 이곳으로 퇴근해 식사하고 책 보고 잠을 잘 것만 같은 모습이다.

기록관1은 용산기지에 실제 거주했던 미군 장교와 가족들의 주거 공간을 재현한 곳이다. [사진=임요희 기자]
마을 끝 ‘아트 라운지’에서는 이왈종 화백의 미디어아트 전시 ‘중도의 섬 제주’을 진행한다. [사진=임요희 기자]
기록관2는 한국 현대 대중음악의 발상지였던 미8군 클럽과 용산기지의 문화적 측면을 다룬다. 신중현, 패티김, 한명숙 등 미8군 무대를 거쳐 간 1세대 대중가수들의 자료와 당시 공연 포스터, LP 음반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부 음반은 현장에서 청음도 가능하다.
약간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용산기지의 100년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용산서가’와 미군 숙소를 개조해 휴게 공간으로 꾸민 ‘카페 어울림’을 방문해 보자. 비행기를 타지 않고 미국의 작은 카페로 날아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축구장 10개 규모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잔디밭과 대형 어린이 놀이터가 갖춰져 있어 시야가 탁 트이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도시에서, 아니 지방을 통틀어 이만한 크기의 잔디밭은 흔하지 않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돗자리를 깔고 녹음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늘마다 의자가 갖춰져 있고 파라솔이 놓여 있어 쉬엄쉬엄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마을 끝 ‘아트 라운지’에서는 이왈종 화백의 미디어아트 전시 ‘중도의 섬 제주’을 진행한다. 인간과 자연, 동식물이 격의 없이 어우러지는 ‘중도(中道)’의 평화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전시홀’에서는 물과 빛, 소리를 이용한 명상 전시 ‘온화’를 운영해 또 다른 편안함 속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1만 명의 행복과 수천 명의 행복 사이에서
그곳은 별세상이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피자헛, 서브웨이, 파파이스, 버거킹, 스타벅스 같은 식당들이 용산기지에는 80년대부터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캠프킴 USO(미군위문협회)에서는 미국 대중 스타들의 공연이 펼쳐져 미군 병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신용산역에서 용산어린이정원으로 향하는 인도에 아파트 조성을 반대하는 근조화환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사진=임요희 기자]
1954년에는 마릴린 먼로가 캠프킴 USO 공연장을 방문해 한국 전체가 떠들썩하기도 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블랙핑크가 해외 위문공연을 간 셈이다. 캠프킴 USO 건물은 최근까지 용산공원갤러리로 이용됐다.
정부가 이곳에 아파트를 지으면 1만여 명의 청년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수십, 수백만 명의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1만 명의 행복과 수백 혹은 수천만의 행복 가운데 어느 게 더 중요할지 심각하게 고려할 일이다.
용산어린이정원은 상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단 토요일에는 밤 9시까지 연장 운영한다. 월요일과 명절 당일은 휴관이다.
임요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