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근 자유시장연구원장·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한미 간 관세협상이 교착상태다.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 달러 현금 입금을 두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4220억 달러(3분기말)에 불과해 만약 3500억 달러를 입금시키고 나면 720억 달러 밖에 남지 않는다. 반면 외채는 금년 2분기말 기준 7356억 달러에 달한다. 그 중 1671억 달러는 1년 내 갚아야 하는 단기외채다. 장기외채 중에서도 1년내 만기가 돌아오는 부분이 있어 이를 단기외채와 합한 외채를 유동외채라고 해서 약 300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이 정도는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적인 준칙이다.
수입은 6318억 달러 (2024년 한국의 통관기준)에 달하는데 국제통화기금(IMF)는 원활한 경상거래를 위해 수입액의 25%에 해당하는 외환보유액을 보유하고 있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국 주식시장에도 외국인이 7432억 달러(10월 10일 기준) 투자하고 있다. 위기 우려 시 언제든지 상당부분이 유출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외환보유액은 3500억 달러가 아니더라도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 달러를 지불할 경우 한국은 곧 바로 외환이 부족해서 위기가 발생하는 외환위기로 직행하게 된다. 1997년 말 발생했던 외환위기가 바로 이런 연유로 발생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실업발생 등 참상과 값진 한국자산의 헐값 매각 등 한국이 치른 댓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 같은 상시무제한 통화스왑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미국도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이 상시 무제한 통화스왑을 체결하고 있는 나라는 유럽연합 영국 스위스 캐나다 일본 뿐이다.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동맹국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미국 돈을 무제한 가져다 쓰라는 일종의 통화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신뢰하지 않고는 통화동맹에 끼워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은 3500억 달러 제공 대가로 미국의 통화동맹에 끼워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국이 어떤 경우라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재명 정부에 그 정도의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 문제다. 이 대통령의 미국방문시 썰렁했던 공항의전에 영빈관도 배정되지 않은데다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이나 공동기자회견은커녕 트럼프의 배웅도 없었던 점은 한미 정상 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했다. 이어진 이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 시에도 한미정상회담은 불발되고 트럼프 대통령 주최 만찬에도 참석치 않은 일들이 이어지면서 한미 간의 외교, 특히 정상외교가 이대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 와중에 미중간의 쟁패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문정부 시절 3불정책을 주장했던 강 전 장관을 주미대사로 지명해 다시 한번 백악관은 한미관계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불(不) 정책’이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추가 배치 금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 편입 금지,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를 천명한 정책이다. 미국의 대중 정책에 배치되는 요소들이 적지 않은 정책들이다. 중국은 ‘3불(不) 정책’의 이행을 요구하며 최근까지 한국 정부를 압박해 왔다. 그러나 사드 배치 정상화 방침을 밝혀온 지난 윤석열 정부는 사드 배치가 군사주권 사안이란 점을 들어 중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원칙을 확고히 하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한미 간의 불편한 관계가 10월 31일~11월 1일 경주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20여 일 앞두고 한미정상회담 개최여부 불투명으로 까지 이어지며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2005년 부산 APEC 이후 20년 만에 한국이 다시 APEC을 주최하지만 한미 관세협상 등 시급한 과제가 산적함에도 한미정상회담 개최여부가 불투명해 지면서 흔치 않은 외교적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이재명 외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1일 개막하는 APEC 참석에 앞서 일본을 먼저 찾는다. 그는 퇴임 결정을 내린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후임이 확정되기도 전에 27일부터 2박 3일간 일본을 방문하기로 확정했다.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를 비롯, 누가 차기 총리가 되든 정상회담을 갖겠다며 일본을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다카이치 총재는 여자 아베로 불리는 인물이다. 과거 아베 수상이 트럼프 1기 시절 골프 드라이브를 들고 당시 트럼프 당선자 사저를 방문해 축하하고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라운딩을 같이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일미간 신뢰를 바탕으로 ‘미국의 양해 하에’ 일본판 양적 완화, 엔화의 대폭적인 절하 등으로 장기불황의 일본경제 회복을 시도한 것이 아베의 ‘세 개의 화살정책’이다. 트럼프가 왜 아직 총리에는 오르지 않은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에 신뢰는 보내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반면 한국 방문 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현재로서는 29일 오전에 서울에 도착 후, 이날 저녁 한국을 떠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PEC 부속 회의 비즈니스 라운딩에 잠깐 얼굴을 비출 뿐, 본 회의는 참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짧은 1박 2일 체류’는 우리 정부의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트럼프의 대한국 압박 카드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3500억 달러 대미(對美) 투자 계획이 구체화되지 않을 경우, 회담이 형식적인 약식 회동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 정상 간 만남 자체가 무산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보다 APEC을 계기로 추진 중인 미·중 정상회담 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가능성에 쏠려 있다. 이 대통령이 사실상 외교 무대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형국이 아닌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모처럼 찾아오는 외교의 호기인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외환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대미국 3500억 달러 제공 등 한미 관세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지 못할 경우 한국은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돌이키기 힘든 타격을 입을 우려도 있다. 미국의 한국수출품에 대한 고율 관세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에 타격이 클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우선 한미 간 신뢰회복이 급선무다. 미국이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재명 정부의 종북 친중 경도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한미간 신뢰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지막 골든타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미 간에 추진 중인 MASGA만 하더라고 미국의 군시기밀이 많은 미국전함을 건조 수리하는데 한미간 굳건한 신뢰가 없이는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신뢰회복을 토대로 한 한미 간 관세협상이 한국경제에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 방향으로 타결되도록 보다 온 국력을 경주해야 할 때다.
한국경제의 생사가 걸린 중대한 사안을 계속 교착되고 있는 장관급 회담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정상 끼리 신뢰를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개인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는 더더욱 신뢰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 최근 미국이 우파 대통령이 당선된 아르헨티나에 통화스왑을 제공한 의미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 지정학적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오정근 자유시장연구원장·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