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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위대하다’ ①사상이 자리 잡는 방식 [특별기고: 松山]
  • 임요희 기자
  • 등록 2026-02-04 0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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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은 어떻게 개인의 머릿속에 들어 오는가
  • 사상은 설득되지 않는다… 익숙해질 뿐

논리는 반박할 수 있지만, 감정은 반박하기 어렵다. 문학은 이 일을 아주 잘한다. 

사상은 토론으로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누군가 아무리 논리를 잘 펼쳐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해서 생각이 곧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설득보다 익숙함에 더 크게 반응한다. 자주 듣고, 자주 읽고, 자주 접한 생각이 어느 순간 ‘원래 그런 것’처럼 자리 잡는다. 사상은 그렇게 들어온다.

 

그래서 사상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곳은 토론장이나 강연장이 아니다. 책이고, 이야기이고, 문장이다. 특히 문학이다. 

 

문학은 설득하지 않는다… 감정을 건드릴 뿐

 

문학은 사상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의 감정과 사건의 흐름 속에 어떤 생각을 자연스럽게 깔아 둔다. 독자는 그것을 사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냥 좋은 이야기, 공감 가는 장면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사상은 경계심이 살아있을 때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다르다. 주인공에게 마음이 가고, 상황에 감정이 실리면 판단은 뒤로 밀린다. 그때 특정한 세계관이 함께 들어온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먼저 그렇게 느끼게 된다.

 

사상이 자리잡는 순간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다. “익숙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처음엔 낯설었던 말이 자꾸 보이고, 비슷한 감정 구조가 반복되며, 늘 같은 방식으로 세상이 설명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시선이 기준이 된다. 따로 배운 적은 없는데,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

 

문학은 이 일을 아주 잘한다. 논리는 반박할 수 있지만, 감정은 반박하기 어렵다. 

 

글 속에서 형성된 연민, 분노, 부끄러움은 머리보다 먼저 몸에 남는다. 문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에 공감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상은 그 공감 위에 얹힌다.

 

그래서 사상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건 사상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게 인간이다” “이게 현실이다” “이렇게 느끼는 게 자연스럽다”는 얼굴로 다가온다. 문학은 그 얼굴을 가장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통로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들은 문학 속에 숨어 있는 사상이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되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다.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를 따지기보다, 어떤 문장이 어떤 감정을 만들었는지, 그 감정이 어떻게 하나의 생각 습관으로 굳어졌는지를 따라간다.

 

독서는 왜 경계심을 내려 놓게 만드는가

 

사람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내려놓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경계다. 이 둘은 다르다. 판단은 나중에라도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경계는 한 번 내려가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독서는 그 경계를 내리게 만드는 행위다. 독서는 위험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서는 즐거운 행위다. 그러나 즐거움 속에서도 무언가는 들어온다. 

일상에서 사람은 늘 무언가를 경계한다. 뉴스는 의도를 의심하며 보고, 정치 발언은 속셈을 따지며 듣는다. 누군가 말을 걸면 설득하려는지, 이용하려는지 먼저 계산한다. 

 

그러나 책 앞에서는 다르다. 책은 말을 걸지 않는다. 손에 쥐고 펼치는 순간, 독자는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느낀다. 읽을지 말지, 어디까지 읽을지는 내가 정한다고 생각한다.

 

이 감각이 경계를 무너뜨린다. 독자는 책을 ‘상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도구로 여긴다. 그래서 방어가 작동하지 않는다. 반박할 필요도, 거리 둘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글은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용히 흘러간다.

 

독서의 시간 배치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독서는 쉬는 시간에 이루어진다. 하루 일을 마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들기 전에 읽는다. 이때 사람은 비판 모드가 아니라 휴식 모드에 있다. 생각을 덜 하고 싶어서 책을 집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가장 열려 있다.

 

문장은 이 상태를 이용한다. 독서를 시작하면 독자는 문장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다음 문장을 읽는다. 이야기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연속성이 판단을 미룬다. “일단 끝까지 읽고 나서 생각하자”는 태도가 반복되면, 생각은 항상 뒤로 밀린다.

 

이것은 독자의 나약함이 아니다. 독서라는 행위의 구조다. 글은 앞에서 뒤로 흐르고, 독자는 그 흐름을 따라간다. 멈춰 서서 의심하고 따지는 순간, 독서는 중단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는 의심하지 않고 읽는 방식을 택한다. 읽는 행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독서는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속아서가 아니다. 신뢰하기 때문이다. 책은 안전하다는 믿음, 문장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독자의 문을 연다. 사상은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온다.

 

“좋은 이야기”라는 말의 방패

 

“이건 그냥 좋은 이야기다.”

 

이 말만큼 강력한 면책 문장도 드물다. 이 말이 등장하는 순간, 많은 질문이 사라진다. 왜 이런 감정을 만들었는지, 왜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무엇을 남기려는지 같은 질문이 모두 불필요해진다. 좋은 이야기인데,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인물이 고생하고, 세상이 불공평하며, 독자는 그 인물 편에 서게 된다. 여기에 슬픔이나 분노, 따뜻함이 적절히 섞이면 이야기는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판단자가 아니라 동행자가 된다.

 

문제는 이 동행이 방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무작위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물의 고통은 특정 원인에 연결되고, 분노는 특정 대상에 향하며, 연민은 특정 집단에 집중된다. 그러나 독자는 그것을 세계관의 제시로 느끼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좋은 이야기”라는 말은 이 흐름을 보호한다. 비판이 들어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치 얘기가 아니라고, 사상 얘기가 아니라고, 문학을 문학으로만 읽으라고. 이 말은 편리하다.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편하다.

 

하지만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다. 무엇에 공감했는지는 곧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어떤 고통을 반복해서 접하면, 그 고통을 설명하는 방식이 기준이 된다.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해석은 나중에 현실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

 

이때 “좋은 이야기”라는 말은 방패 역할을 한다. 사상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사상을 숨긴다. 독자는 안심하고 받아들인다.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판단이 된다. 받아들인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이 방패는 위험하다. 공격적인 주장보다 훨씬 오래 남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구호는 거부할 수 있지만, 좋은 이야기는 거부하기 어렵다. 이미 감정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사상은 이 감정 위에서 자란다.

 

비판적 독서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비판적 독서는 늘 가능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가능한 순간이 제한적이다. 머리가 맑고, 감정이 가라앉아 있고, 목적을 가지고 읽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서는 그렇지 않다. 피곤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읽을 때,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을 때 이루어진다.

 

이때 비판은 방해물처럼 느껴진다. 굳이 왜 따져야 하나, 그냥 읽으면 안 되나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비판은 즐거움을 깨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스스로 비판을 중단한다.

 

문장이 부드러울수록 이 현상은 강해진다. 거친 주장, 공격적인 문장은 반발을 부르지만, 차분한 설명과 인간적인 고백은 경계를 누그러뜨린다. 글쓴이가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일수록, 독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이 사람을 평가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순간은 반복이다. 같은 감정 구조가 여러 작품에서 반복될 때, 독자는 더 이상 그것을 주장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냥 문학의 문법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판은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비판은 낯섦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상은 반복을 통해 낯섦을 제거한다. 문학은 이 반복을 가장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장르다. 이야기와 감정은 반복되어도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적 독서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은 예외가 아니다. 정상 상태에 가깝다. 인간은 늘 깨어 있는 독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편안한 독자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상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독자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구조를 드러내려는 시도다. 우리가 언제 가장 취약해지는지 알아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즐거운 행위다. 그러나 즐거움 속에서도 무언가는 들어온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생각은 언제나 뒤늦게 따라갈 뿐이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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