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왕도. 망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명부 세계와 지옥 장면을 그린 조선시대 불화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부처님오신날의 언어는 자비다. 등불을 밝히고, 마음을 낮추며, 고통받는 존재를 돌아보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 정치판을 바라보며 자비만을 말하기는 어렵다.
정치가 고통을 줄이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가 예외가 되는 지점이 있다.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고통 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거짓이 반복되고, 책임이 사라지며, 권력이 제도를 자기 보호의 수단으로 삼을 때 자비는 침묵이 될 수 없다. 그때 자비는 용서보다 먼저 멈춤을 요구한다.
불교가 경계한 것은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그 악행을 낳는 마음의 뿌리였다. 그것이 탐진치다.
탐은 탐욕이고, 진은 분노이며, 치는 어리석음이다. 탐욕은 끝없는 집착이고, 분노는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이며, 어리석음은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이다.
탐진치는 원인이고, 삼악도(三惡道)는 그 결과다. 계정혜(戒定慧)는 그 악순환을 끊는 길이다.
탐욕은 계로 경계하고, 분노는 정으로 가라앉히며, 어리석음은 혜로 밝혀야 한다.
부처님오신날의 자비는 그래서 무조건적 용서가 아니다. 탐진치를 방치하지 않고, 삼악도로 기울어가는 공동체를 멈춰 세우라는 요구다.
삼악도는 불교에서 윤회의 고통스러운 세계를 가리키지만, 오늘의 정치 현실을 비추는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지옥도는 분노와 증오가 지배하는 세계다.
아귀도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세계다.
축생도는 스스로 보려 하지 않고, 묻지 않고, 따라가기만 하는 어리석음의 세계다.
오늘 대한민국 정치판은 이 세 길을 동시에 닮아가고 있다.
탐(貪)- 탐욕이 법을 방패로 만들 때
탐욕의 정치는 더 많은 자리와 권력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법을 공동체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편의 방패로 삼으려는 순간, 정치는 아귀도의 문 앞에 선다. 법은 모두에게 같은 기준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 편에게는 면책을 요구하고 상대에게는 처벌을 요구하는 이중 기준이 반복될 때, 개혁이라는 말은 탐욕의 가면이 된다.
조작기소(공소취소) 특검법 논란은 그래서 단순한 법안 논쟁이 아니다.
수사와 기소의 적정성을 따지는 일은 필요할 수 있다. 검찰권이 남용됐는지, 정치적 기소가 있었는지 검증하는 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재판 중인 사건의 공소 유지 여부까지 정치권이 새 특검 구조 안에서 다시 흔들 수 있다는 의심이 제기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순간 국민은 묻게 된다. 이것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법인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법인가.
법이 권력자를 향한 검증의 칼이 아니라 권력자를 덮는 방패로 의심받는 순간, 정치의 탐욕은 노골화된다.
아귀도는 결핍의 세계가 아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져도 부족하고, 아무리 이겨도 불안한 탐욕이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내는 세계다.
탐욕의 해법은 계(戒)다.
계는 억압이 아니라 경계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아는 일이다.
정치에서 계는 법을 자기편 방패로 삼지 않는 금도다. 권력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법의 방향을 비틀지 않는 절제다. 계가 사라진 정치에서 법은 기준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진(瞋)- 분노가 반대자를 내란으로 낙인찍을 때
분노의 정치는 상대를 설득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법적 책임은 법정에서 가려야 한다.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행위가 있었다면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책임 추궁이 정치적 반대자 전체를 향한 낙인으로 확장되는 순간, 분노는 정의가 아니라 지옥도의 언어가 된다.
지금 정치권에는 ‘내란’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흐른다. 내란은 가장 무거운 헌정 파괴의 언어다. 그 말은 엄격해야 하고, 법적 판단과 정치적 선동은 구분돼야 한다.
그런데 선거판에서 상대 진영 전체를 내란 세력으로 묶고, 반대 의견까지 내란 옹호의 그림자 아래 밀어 넣는다면 민주주의는 토론장이 아니라 처벌 욕망의 경기장이 된다.
분노가 정의의 옷을 입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기준이다. 내 편의 분노는 의로운 것이 되고, 상대의 문제 제기는 반민주가 된다. 질문은 공격으로 오해되고, 반론은 처벌의 명분이 된다.
정치가 이런 언어에 길들면 국민은 더 이상 정책을 비교하지 않는다.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만 학습한다. 그것이 지옥도다.
분노의 해법은 정(定)이다.
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다. 멈춰 서서 다시 보는 힘이다. 정치에서 정은 반대자를 내란으로 낙인찍는 언어를 멈추는 일이다. 분노를 동원해 표를 모으는 쉬운 길 대신, 사실과 책임을 구분하고 법과 정치를 분리하는 절제다. 정이 사라진 정치에서 언어는 곧 폭력이 된다.
치(癡)- 어리석음이 검증을 외면할 때
치의 정치는 단순한 무식의 정치가 아니다. 공부하지 않으려는 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으려는 마음, 검증해야 할 것을 검증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의 정치다.
불교에서 말하는 치는 무명이다. 어둠 속에 있다는 뜻이다. 정치에서 치는 국민에게 충분히 보여주지 않고, 묻지 못하게 하고, 검증 요구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출발점에 의문이 제기됐을 때 필요한 것은 조롱이 아니라 검증이다.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단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부정선거 가능성을 묻는 질문 자체를 비정상으로 몰고, 선거 절차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시민을 낙인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자신감이 아니다. 정치의 치다.
검증을 두려워하는 민주주의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투표지, 개표 절차, 사전투표와 당일투표의 차이, 선관위 시스템, 참관과 감시의 구조를 시민이 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대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통해 선거는 더 단단해진다.
의혹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혹 제기자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의혹이 설 자리 없을 만큼 투명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치의 정치는 부정선거를 단정하는 정치가 아니다. 선거 절차에 대한 합리적 검증 요구를 조롱하고 회피하는 정치다. 공부하지 않고 단정하며, 확인하지 않고 낙인찍고, 설명하지 않고 통제하려는 태도다.
그런 정치가 국민의 눈과 입을 막는 입법으로 흐를 때, 민주주의는 절차만 남고 정신을 잃는다.
어리석음의 해법은 혜(慧)다.
혜는 바로 보는 지혜다. 정치에서 혜는 공부하고, 묻고, 확인하고, 검증하는 태도다.
선거 절차에 의문이 제기됐을 때 조롱이 아니라 자료로 답하는 일이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의 질문을 막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설명과 더 투명한 절차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혜가 사라진 정치에서 국민은 시민이 아니라 동원의 대상이 된다.
자비는 면죄부가 아니다
불교는 탐진치(貪瞋癡)의 해법으로 계정혜(戒定慧)를 말한다. 탐욕은 계로 다스리고, 분노는 정으로 가라앉히며, 어리석음은 혜로 밝힌다.
이것은 종교적 수행의 언어이지만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탐욕의 정치에는 경계가 필요하고, 분노의 정치에는 멈춤이 필요하며, 어리석음의 정치에는 검증과 지혜가 필요하다.
자비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잘못한 사람에게도 돌아올 길은 있어야 한다. 참회하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려야 하고, 실수한 사람에게는 다시 설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참회 없는 반복, 책임 없는 변명, 피해자 없는 용서는 자비가 아니다. 그것은 가해자의 안락을 위해 피해자의 고통을 지우는 일이다.
자비는 약자를 향해야 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거짓을 덮고, 탐욕을 감싸고, 분노의 낙인을 방치하며, 검증을 외면하는 일을 자비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방임이다. 평화가 아니라 굴종이다. 화합이 아니라 침묵의 강요다.
부처님오신날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단순히 얼마나 자비로운가가 아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어디까지 자비로워야 하는가다.
법을 자기편 방패로 만드는 탐욕 앞에서 자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반대자를 내란으로 낙인찍는 분노 앞에서 자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선거 검증을 외면하는 어리석음 앞에서 자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불가의 지옥은 단순한 사후 처벌장이 아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만든 업의 세계다.
분노가 극단에 이르면 지옥도가 열리고, 탐욕이 끝을 모르면 아귀도가 열리며, 어리석음이 눈을 가리면 축생도의 길이 열린다.
정치가 분노를 먹고, 탐욕을 법으로 포장하며, 검증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때 지옥은 더 이상 사후세계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정치의 얼굴이 된다.
자비는 모든 것을 덮는 말이 아니다. 자비는 고통을 보는 눈이고, 고통을 멈추게 하는 힘이다.
탐욕이 아귀도의 문을 열 때, 자비는 계를 요구해야 한다.
분노가 정치판을 지옥도로 만들 때, 자비는 정을 요구해야 한다.
어리석음이 공동체를 축생도의 길로 끌고 갈 때, 자비는 혜를 요구해야 한다.
삼악도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매일 쓰는 정치의 언어 속에 있다.
내 편의 잘못은 덮고 상대의 잘못만 벌하려는 마음이 아귀도다.
상대를 설득하지 않고 제거하려는 마음이 지옥도다.
묻고 확인하고 공부하는 일을 포기한 마음이 축생도다.
부처님오신날의 등불은 마음의 어둠만 비추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어둠도 비춰야 한다. 정치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국민을 삼악도의 길로 끌고 간다면, 그 앞에서 자비는 침묵할 수 없다.
자비가 예외가 되는 지점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면죄가 더 많은 사람의 고통을 낳을 때다.
거짓을 감싸는 일이 진실을 처벌하는 결과가 될 때다.
권력의 탐욕을 관용하는 일이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때다.
선거 검증을 외면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흐리게 할 때다.
그때 자비는 용서가 아니라 경고가 되어야 한다.
탐욕에는 계를, 분노에는 정을, 어리석음에는 혜를 요구하는 경고 말이다.
그것이 부처님오신날, 삼악도로 기울어가는 정치판 앞에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자비의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