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은 19세기 프랑스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들의 처절한 삶을 그린다. 클로드 베리 감독이 1993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스틸컷]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자기가 겪은 일, 자기가 들은 말, 자기가 받은 상처, 자기가 견딘 시간은 다른 어떤 이론보다 강하게 머릿속에 남는다. 책에서 읽은 문장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 더 오래 남고, 통계표 한 장보다 내가 당한 일 한 번이 더 크게 기억된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설명할 때 자꾸 자기 경험부터 꺼낸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살아 낸 것부터 믿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세상 전체를 설명하는 위험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긴다. 내게 있었던 일이 내 삶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상 전체를 설명하는 기준으로 올라갈 때다.
내가 겪은 일이 곧 모두의 현실이 되고, 내가 본 것이 곧 사회의 진실이 되고, 내가 상처받은 일이 곧 시대의 본질이 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개인 경험은 사적인 기억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는 말로 바뀐다.
여기서 이야기는 더 이상 “내가 이랬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세상은 이렇다”로 커진다. 바로 여기서 개인 경험의 정치화가 시작된다.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 변화를 가장 예민하게 보여 준다. 소설 속 인물은 늘 자기 삶을 말한다. 나는 가난했고, 나는 무시당했고, 나는 사랑받지 못했고, 나는 억눌렸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독자는 그것을 개인의 고백으로 읽는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그 고백을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불행을 한 계급의 불행으로 키우고, 한 사람의 상처를 한 시대의 죄로 넓히고, 한 사람의 외로움을 사회 전체의 폭력으로 바꾼다. 문학은 바로 이 넓히기의 기술을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장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보면 이 방식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는 한 아이다. 배고프고, 얻어맞고, 버려진 아이다. 독자는 처음에는 한 고아의 비참한 삶을 본다.
그런데 소설은 곧 한 아이의 비참함을 빅토리아 시대 영국 빈민 행정 전체의 문제로 키운다. 올리버는 더 이상 한 아이가 아니다. 제도의 잔혹함을 증언하는 입이 된다. 개인의 고통이 사회 비판으로 옮겨가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개인의 고통을 체제의 문제로 연결하는 오류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광부 몇 명의 고된 삶에서 출발한다. 배고픔, 탄광 붕괴, 낮은 임금, 굶주린 가족이 먼저 나온다. 처음에는 한 노동자의 생활처럼 보인다. 그런데 소설은 이 고통을 개인의 불운으로 두지 않는다.
자본과 노동의 싸움, 계급 충돌, 산업 질서의 잔혹함으로 넓힌다. 여기서 한 사람의 삶은 곧 정치가 된다. 독자는 광부 개인을 읽다가 사회 체제 전체를 읽게 된다.
20세기 문학으로 가면 이 방식은 더 직접적이 된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한 여성의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술 취한 남편, 가난한 집, 아들의 변화. 출발은 아주 사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집안의 사정을 곧 혁명 선전으로 키운다. 아들의 변화는 계급 각성으로 바뀌고, 어머니의 불안은 혁명 동참으로 바뀐다. 집안의 사정은 정치가 되고, 가족의 언어는 혁명 문법으로 바뀐다. 여기서 개인 경험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조직의 언어로 흡수된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독자에게 아주 강한 착각을 준다. “이 사람이 이렇게 아팠다면, 사회 전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판단은 가능하다. 개인의 고통은 사회 문제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단서가 곧 증거가 될 때다.
한 사람의 체험은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곧바로 보편의 증명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문학은 독자의 마음을 빠르게 움직인다. 그래서 독자는 자주 이 둘을 섞는다. 한 사람의 체험을 사회 전체의 판결문처럼 받아들인다.
개인의 경험은 사회 이해의 단서일 뿐 증거 될 수 없어
이런 방식은 현대 에세이와 자서전 서사에서 더 강해졌다. 오늘날 많은 글은 “내가 겪었다”에서 출발한다. 회사에서 무시당한 일, 학교에서 겪은 차별, 가족 안에서 받은 상처, 연애에서 겪은 불균형 같은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처음에는 고백이다. 그런데 글은 곧 “그래서 이 사회는 병들었다”로 넘어간다. “내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 사회 전체가 이렇다”는 식의 일반화가 시작된다. 개인 경험은 여기서 주장으로 바뀐다.
이 과정은 대개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경험이 나온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다음에는 해석이 붙는다. “이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마지막에는 규범이 붙는다. “그러니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바로 이 세 단계가 개인 경험이 정치 언어로 바뀌는 기본 경로다. 경험은 원래 사적 기억이지만, 해석이 붙는 순간 공적 언어가 되고, 규범이 붙는 순간 정치가 된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의 권위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의심하지 않는다. 남의 말은 틀릴 수 있어도 내가 겪은 일은 틀릴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경험은 강하다. 반박하기 어렵고, 비판하면 잔인해 보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경험은 정치 언어로 쓰일 때 매우 강력해진다. 논리보다 빠르고, 통계보다 세고, 반론을 쉽게 도덕 문제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보아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노예제는 분명 거대한 제도 폭력이었다. 그런데 모리슨은 그것을 역사책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한 여성의 몸, 한 어머니의 기억, 한 가족의 상처로 보여 준다. 독자는 제도를 논리로 배우지 않고 고통으로 체험한다. 문학은 이렇게 제도를 개인의 상처 속에 넣어 보여 준다. 이 방식은 강력하다. 동시에 매우 위험하다. 독자는 제도의 문제를 이해하는 대신, 가장 강하게 아픈 사례 하나를 사회 전체의 얼굴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을 읽을 때 늘 물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경험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의 증거인가? 이 고통은 중요한 사례인가, 아니면 곧바로 일반화할 수 있는 사실인가? 문학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크다. 바로 그 힘 때문에 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개인의 경험은 세상을 이해하는 귀한 단서다. 그러나 단서와 증거는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세상을 여는 문이 될 수는 있어도, 그 문 하나가 세상 전체는 아니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