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문제는 좌파의 상식이 대한민국의 상식이라는 것이다 [특별기고]
  • 松山 시인
  • 등록 2025-12-30 00:25:20
기사수정
  • 좌파 문화 위 우파 정권은 결국 단기 관리자
  • 우파의 숫자는 차갑고, 좌파의 스토리는 따뜻해

좌파 문화와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이 서는 것은 바위 위에 소나무를 올려놓고 뿌리내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

좌파 문화와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이 서는 것은 바위 위에 소나무를 올려놓고 뿌리 내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 결코 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정치 권력은 눈에 보이는 꼭대기이고 문화는 보이지 않는 지반이다. 지반이 무엇을 흡수하고 무엇을 밀어내는지에 따라 그 위에 세운 구조물의 수명과 안정성은 결정된다. 

 

토양 바꾸지 않고 나무 생장 기대할 수 없어

 

문화가 좌파적 감수성과 언어·도덕규범으로 꽉 채워져 있는데 그 위에 우파 정권이 올라앉아 정책 몇 개로 방향을 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토양을 바꾸지 않고 나무의 생장을 명령하는 것과 같다.

 

정권은 법과 예산을 움직인다. 그러나 문화는 습관과 언어, 칭찬과 비난의 기준, 즉 상식을 움직인다. 사람들은 무엇이 멋진지, 무엇이 부끄러운지, 무엇이 ‘착한 선택’인지에 따라 행동한다. 

 

이 기준이 좌파 문화로 굳어 있으면, 우파 정권의 정책은 늘 애써 설명해야 할 대상이 되고, 방어해야 할 예외가 된다. 

 

예를 들어 세금 감면은 ‘소수를 위한 특권’으로, 규제 완화는 ‘재벌의 탐욕’으로, 국가 역할의 절제는 ‘정부의 무책임’으로 자동 번역된다. 정책의 취지가 아니라 이미 자리잡은 좌파식 번역의 결과가 여론을 지배한다.

 

감정 동원해 ‘옳음’ 선점하는 좌파

 

좌파 문화의 강점은 제도보다 감동 스토리에 있다. 피해자 중심의 이야기, 도덕적 우월의 언어, 감정의 동원을 통해 ‘옳음’을 선점한다. 이때 우파 정권은 늘 늦다. 수치와 성과를 들고 와도, 이미 판정은 내려져 있다. 

 

우파 정부의 숫자는 차갑고, 좌파 문화의 스토리는 따뜻하다. 게다가 따뜻함이 도덕의 옷을 입는 순간, 정책의 효과는 별 필요없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바위 위의 소나무가 물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햇볕이 없어서가 아니라, 뿌리가 내려갈 틈이 없어서다.

 

문화는 학교에서, 미디어에서, 예술과 유머에서 반복된다. 무엇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무엇을 눈물의 대상으로 만드는지의 선택이 누적(상식)되어 사회의 방향을 정한다. 좌파 문화는 권력을 의심하는 대신 ‘구조’를 의심하게 만들고, 개인의 선택을 묻기보다 ‘시스템’을 탓하도록 훈련한다. 

 

이런 좌파 문화 환경에서 우파 정권이 개인 책임과 시장의 자율을 말해봤자,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변명이 된다. 변명은 언제나 설득력을 잃는다.

 

문화는 일상에서 매일 투표한다

 

더 큰 문제는 우파 내부의 착각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문화도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문화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지 않는다. 

 

문화는 일상에서 매일 투표한다. 어떤 말이 자연스러운지, 어떤 표현이 금기인지, 어떤 농담이 허용되는지의 미세한 판정이 쌓여 정치의 상한선, 즉 대중의 상식을 만든다. 이 상한선 아래에서는 어떤 정책도 숨을 쉬기 어렵다. 

 

바위 위에 올린 소나무는 비바람을 견딜 수는 있어도, 성장하지는 못한다.

 

좌파 문화 위의 우파 정권은 결국 단기 관리자가 된다. 개혁가가 아니라 조정자, 창조자가 아니라 소방수다. 매번 불을 끄느라 다음 숲을 설계할 시간이 없다. 그러는 사이 좌파 문화는 더 단단해진다. 

 

좌파식 도덕은 더 예리해지고, 우파는 탐욕이라는 낙인은 더 빠르게 찍힌다. 우파 정권은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는 해명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축소된 권력은 성과를 내기 어렵고, 성과 없는 권력은 다시 선거에서 패한다. 지독한 악순환이다.

 

해법은 정권 이전에 문화다. 정책 이전에 언어와 도덕이다. 자유와 책임, 성과와 보상, 실패의 권리를 일상의 말로 복원해야 한다. 

 

정권 이전에 문화다. 정책 이전에 언어와 도덕이다. 자유와 책임, 성과와 보상, 실패의 권리를 일상의 말로 복원해야 한다. 

시장을 탐욕으로 번역하는 관성을 깨고, 교환을 협력으로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국가는 보호자이되 보호자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연대는 강요가 아니라 선택임을 반복해서 보여줘야 한다. 

 

이 작업은 느리고 지루하다. 그러나 지반을 바꾸는 일은 원래 그렇다.

 

정권은 나무의 줄기다. 문화는 토양이다. 줄기를 굵게 만들고 잎을 무성하게 하려면, 토양을 먼저 갈아야 한다. 좌파 문화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을 얹어 놓고 기적을 기대하는 대신,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바위 위의 소나무는 사진으로는 멋있을지 몰라도, 숲이 되지는 못한다. 숲을 원한다면, 흙부터 만들어야 한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12-30 07:24:49

    개대지 국민 ㅠ

  • 프로필이미지
    ENSKim33162025-12-30 06:03:35

    한국이 희망이 없는 이유는 기득권층의 목적이 나라를 영원히 낙오된 상태로 유지하려는 데 있고 많은 국민이 이런 상황속에 안주하기를 원한다는 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은 변화와 경쟁을 통해 삶의 질의 향상을 꾀하기 보다는 그저 아무 노력도 안하고 모두가 똑같이 위에서 나눠주는 것이나 받아 먹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북한 같은 쌩 지옥이 아무 문제없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도 한국인들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퇴보적인 민족성 때문이다. 로마니아의 차우체스쿠는 북한같은 체제를 만들려다 사람들에게 맞아죽었지만 그보다 더한 폭정아래서도 북한 주민들이 말없이 있는 이유를 우리는 체제가 아닌 민족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독려하고 일깨워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퇴보적인 민족성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려다가 암살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솔까, 우리민족의 민족성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수동적이고 퇴보적 경향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전라도가 이런 악평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가장 강하고 경상도 사람들, 특히 경상북도 사람들이 가장 덜하며 그래서 대구 출신의 박정희와 그 주변 경상북도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이 가장 크게 발전을 했지만 그 산업화 기간 내내 전라도 사람들은 이러한 산업화에 극렬히 저항을 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가 결국 선진화 된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버리게 된 것이다.
    남의 탓을 할 게 아니라 나라가 이렇게 되도록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자들이 이끄는 인간 기생충 집단의 악의적인 거짓말로 가득찬 선동에 쉽게 흔들렸던 우리 민족의 모자란 민족성을 우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유니세프-기본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