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문화와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이 서는 것은 바위 위에 소나무를 올려놓고 뿌리내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
좌파 문화와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이 서는 것은 바위 위에 소나무를 올려놓고 뿌리 내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 결코 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정치 권력은 눈에 보이는 꼭대기이고 문화는 보이지 않는 지반이다. 지반이 무엇을 흡수하고 무엇을 밀어내는지에 따라 그 위에 세운 구조물의 수명과 안정성은 결정된다.
토양 바꾸지 않고 나무 생장 기대할 수 없어
문화가 좌파적 감수성과 언어·도덕규범으로 꽉 채워져 있는데 그 위에 우파 정권이 올라앉아 정책 몇 개로 방향을 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토양을 바꾸지 않고 나무의 생장을 명령하는 것과 같다.
정권은 법과 예산을 움직인다. 그러나 문화는 습관과 언어, 칭찬과 비난의 기준, 즉 상식을 움직인다. 사람들은 무엇이 멋진지, 무엇이 부끄러운지, 무엇이 ‘착한 선택’인지에 따라 행동한다.
이 기준이 좌파 문화로 굳어 있으면, 우파 정권의 정책은 늘 애써 설명해야 할 대상이 되고, 방어해야 할 예외가 된다.
예를 들어 세금 감면은 ‘소수를 위한 특권’으로, 규제 완화는 ‘재벌의 탐욕’으로, 국가 역할의 절제는 ‘정부의 무책임’으로 자동 번역된다. 정책의 취지가 아니라 이미 자리잡은 좌파식 번역의 결과가 여론을 지배한다.
감정 동원해 ‘옳음’ 선점하는 좌파
좌파 문화의 강점은 제도보다 감동 스토리에 있다. 피해자 중심의 이야기, 도덕적 우월의 언어, 감정의 동원을 통해 ‘옳음’을 선점한다. 이때 우파 정권은 늘 늦다. 수치와 성과를 들고 와도, 이미 판정은 내려져 있다.
우파 정부의 숫자는 차갑고, 좌파 문화의 스토리는 따뜻하다. 게다가 따뜻함이 도덕의 옷을 입는 순간, 정책의 효과는 별 필요없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바위 위의 소나무가 물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햇볕이 없어서가 아니라, 뿌리가 내려갈 틈이 없어서다.
문화는 학교에서, 미디어에서, 예술과 유머에서 반복된다. 무엇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무엇을 눈물의 대상으로 만드는지의 선택이 누적(상식)되어 사회의 방향을 정한다. 좌파 문화는 권력을 의심하는 대신 ‘구조’를 의심하게 만들고, 개인의 선택을 묻기보다 ‘시스템’을 탓하도록 훈련한다.
이런 좌파 문화 환경에서 우파 정권이 개인 책임과 시장의 자율을 말해봤자,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변명이 된다. 변명은 언제나 설득력을 잃는다.
문화는 일상에서 매일 투표한다
더 큰 문제는 우파 내부의 착각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문화도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문화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지 않는다.
문화는 일상에서 매일 투표한다. 어떤 말이 자연스러운지, 어떤 표현이 금기인지, 어떤 농담이 허용되는지의 미세한 판정이 쌓여 정치의 상한선, 즉 대중의 상식을 만든다. 이 상한선 아래에서는 어떤 정책도 숨을 쉬기 어렵다.
바위 위에 올린 소나무는 비바람을 견딜 수는 있어도, 성장하지는 못한다.
좌파 문화 위의 우파 정권은 결국 단기 관리자가 된다. 개혁가가 아니라 조정자, 창조자가 아니라 소방수다. 매번 불을 끄느라 다음 숲을 설계할 시간이 없다. 그러는 사이 좌파 문화는 더 단단해진다.
좌파식 도덕은 더 예리해지고, 우파는 탐욕이라는 낙인은 더 빠르게 찍힌다. 우파 정권은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는 해명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축소된 권력은 성과를 내기 어렵고, 성과 없는 권력은 다시 선거에서 패한다. 지독한 악순환이다.
해법은 정권 이전에 문화다. 정책 이전에 언어와 도덕이다. 자유와 책임, 성과와 보상, 실패의 권리를 일상의 말로 복원해야 한다.
정권 이전에 문화다. 정책 이전에 언어와 도덕이다. 자유와 책임, 성과와 보상, 실패의 권리를 일상의 말로 복원해야 한다.
시장을 탐욕으로 번역하는 관성을 깨고, 교환을 협력으로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국가는 보호자이되 보호자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연대는 강요가 아니라 선택임을 반복해서 보여줘야 한다.
이 작업은 느리고 지루하다. 그러나 지반을 바꾸는 일은 원래 그렇다.
정권은 나무의 줄기다. 문화는 토양이다. 줄기를 굵게 만들고 잎을 무성하게 하려면, 토양을 먼저 갈아야 한다. 좌파 문화 사회 위에 우파 정권을 얹어 놓고 기적을 기대하는 대신,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바위 위의 소나무는 사진으로는 멋있을지 몰라도, 숲이 되지는 못한다. 숲을 원한다면, 흙부터 만들어야 한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