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하메네이 사진을 불태우는 이란 군중. [사진=X]
이란은 처음부터 반미 국가가 아니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이란 사회의 기본 인식은 오히려 “미국과는 일단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쪽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이란을 이해하려면, 먼저 누가 이 나라를 실제로 쥐고 흔들고 있었는지를 봐야 한다.
20세기 초중반 이란에서 정치와 경제에 가장 깊이 개입한 외부 세력은 미국이 아니었다.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후의 소련이었다. 특히 석유 문제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고, 북쪽 국경과 군사·이념 문제에서는 러시아와 소련의 압박이 훨씬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① 친미 국가의 성립(1941~1951)
영국계 회사였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는 이란 남서부 후제스탄주 일대의 석유 생산과 정제 시설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다.
아바단 정유시설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이란 석유 체제 전체의 심장 같은 곳이었다. 훗날 1951~1953년 석유 국유화와 봉쇄로 이어지는 위기의 중심이 바로 이 아바단이었다는 점은 꽤 상징적이다.
영국은 이미 석유를 움켜쥐고 있었고, 소련은 국경 너머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던 반면 미국은 이란을 직접 지배한 적도 없고, 중동에서 영국만큼 오래 이권을 쌓아온 나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은 ‘가장 위험한 강대국’이라기보다, 비교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나라로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란은 미국이 좋아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미국을 활용하려 했다. 미국 역시 이란을 냉전 구도 속에서 소련을 견제하는 나라로 보았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즉위한 이후, 왕정은 근대화와 군 현대화, 행정 정비를 위해 외부 지원이 필요했다.
이때 미국은 기술과 교육, 군사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로 선택됐다. 실제로 미국의 對이란 지원은 정치적 보호, 군사 물자, 기술 원조가 한 묶음으로 움직였다.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는 1950년대 초 이란에 제공된 군사 원조 규모가 구체적인 숫자로 나온다. 수천만 달러 규모의 무기 대출과 무상 지원이 언급되며, 목적은 이란군을 어느 정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어 소련이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지원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국가 구조와 군사 균형을 통해 친미 성향을 굳히는 역할을 했다.
기술 원조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이 제시한 포인트 포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 지원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고, 이란에서도 농업·보건·교육 분야에서 실제로 시행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근대화를 도와주는 나라’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 시기의 친미는 이념이 아니었다. 미국을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영국을 견제하고 소련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계산은 1951년 이후 석유 국유화 문제를 거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② 석유 국유화와 1953년 쿠데타(1951~1954)
이란의 반미 감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 1953년 8월 테헤란에서 일어난 쿠데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이란은 선거와 의회, 총리 제도를 통해서도 주권을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당시 총리는 모하마드 모사데그였다. 그는 1951년부터 석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핵심은 석유 국유화였다. 이는 영국계 AIOC가 장악하고 있던 석유 통제권을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국유화는 곧 국제 충돌로 이어졌다. 영국은 외교적 항의에 그치지 않고, 이란 석유 수출을 막아 경제를 압박했다. 해상 운송과 보험, 거래망을 통해 이란 석유를 국제 시장에서 고립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압박으로 이란의 재정과 수입은 크게 흔들렸다.
미국의 태도는 처음부터 단호하지 않았다. 트루먼 행정부는 쿠데타에 비교적 신중했고, 영국의 강경 노선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냉전 논리가 앞서게 되면서, 모사데그 정권이 약해질 경우 공산주의 세력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결국 1953년 8월 중순 쿠데타가 발생했다. 테헤란에서 친왕정 세력과 군이 움직였고, 모사데그는 축출되었다. 이후 파즐롤라 자헤디가 총리가 되었고, 팔레비 국왕의 권력은 형식적 존재에서 실권을 가진 위치로 바뀐다.
1954년 이후 이란의 석유 체제는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이란 석유는 더 이상 영국의 독점 대상이 아니었고, 미국 석유 회사들이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 체제로 넘어갔다. 형식상 국유화는 유지되었지만, 실질적 통제권은 다시 외부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사회에 각인된 인식은 자원에 대한 주권을 되찾으려 하면, 외부 강대국은 협상 대신 정권을 바꾸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었다. 이 기억은 이후 이란 사회에 깊게 남아, 반미 감정이 형성되는 토양이 된다.
③ 친미의 강화와 권력 집중(1954~1978)
1953년 쿠데타 이후 이란은 겉으로는 다시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미국과의 관계도 빠르게 복원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미국에게 이란은 소련을 막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라였다. 소련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공산화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란 왕정 역시 미국과의 결속을 원했다. 쿠데타 이후 국왕의 권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를 유지하려면 군대와 정보기관, 행정 조직이 안정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국은 이 모든 것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였다. 무기와 군사 훈련, 정보 협력, 경제 개발 자금과 기술까지 한꺼번에 제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문제는 이 결속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했느냐였다. 미국이 중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안정이었다. 선거가 잘 치러지는 나라보다,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는 나라가 더 중요했다. 이란 왕정은 이 점을 정확히 읽었다.
이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963년의 백색혁명이다. 토지개혁, 교육 확대, 산업 정책, 여성 참정권 확대 같은 내용은 겉으로 보면 진보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토지개혁을 통해 수백만 가구가 땅을 분배받았고,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정책도 확대되었다. 이란 사회는 분명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아래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개혁의 속도와 방향을 정권이 일방적으로 정했고,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정치 공간은 거의 없었다.
의회는 형식적인 존재로 밀려났고, 언론과 정당 활동은 강하게 제한되었다. 정치적 불만은 제도 안에서 풀 수 없었고,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권력은 점점 더 중앙 팔레비 왕정으로 집중됐다. 반대 세력을 관리하고 감시하기 위한 조직도 강화되었다.
많은 시민에게 국가는 ‘변화를 말하는 국가’이면서 동시에 ‘말을 조심해야 하는 국가’가 되었다. 삶은 조금씩 나아졌을 수 있지만, 숨 쉴 공간은 넓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친미의 의미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정권의 입장에서 친미는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군대는 강해졌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았으며,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과 기술도 계속 들어왔다. 미국과의 관계는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시민의 눈에 비친 친미는 달랐다. 1953년의 쿠데타 기억 위에, 이후 이어진 정치적 통제와 억압이 겹쳐졌다.
미국은 더 이상 멀리 있는 나라가 아니라, 이 팔레비 왕정 체제의 뒷배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친미라도, 위에서는 살아남는 방법이었고, 아래에서는 자존심을 누르는 구조였다.
이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지 않았다.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가 빠를수록, 정치적 불만도 더 빠르게 쌓였다. 결국 이 긴장이 1970년대 후반에 한꺼번에 터지게 된다.
④ 반미의 폭발(1979~1981)
1979년 이란 혁명은 흔히 종교 혁명으로 불린다. 물론 종교는 혁명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종교만으로 이 혁명을 설명하면, 왜 분노의 방향이 미국을 향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혁명은 오랜 시간 쌓인 불신과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결과였다.
1953년 이후 이란 사회에는 “우리가 선택한 지도자는 외부의 개입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이 인식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위에 정치적 통제, 경제적 불균형, 빠른 근대화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겹쳐졌다. 사람들은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은 정보를 접했지만, 정치에 참여할 길은 없었다.
이 분노를 하나로 묶어준 인물이 루홀라 호메이니(1902~1989)였다. 그는 왕정을 비판했고, 외세의 개입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루홀라 호메니이 벽화. [사진=연합뉴스]
그의 말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쉽게 이해되는 언어였다. “이 체제는 우리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통했다.
루홀라 호메이니 혁명이 성공한 뒤, 새로운 체제는 스스로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이 체제는 과거와 단절해야 했고, 그 단절을 분명히 보여줄 상징이 필요했다.
미국은 그 상징으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다. 미국은 왕정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고, 1953년의 기억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79년 11월4일의 미국 대사관 점거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미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대사관은 외교 공간이었지만, 이란 내부에서는 과거의 개입과 굴욕이 겹쳐진 장소로 인식되었다. 인질을 잡는다는 극단적인 방식은, 세계를 향해 새로운 체제가 어떤 나라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444일 동안 이어진 인질 사건은 이란 내부에서도 체제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혁명 직후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서로 다른 세력이 권력을 놓고 다툰다. 이때 외부의 적이 분명하면, 내부 갈등을 잠시 덮을 수 있다. 미국과의 대립은 새 체제가 스스로를 하나로 묶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다.
이 시점을 지나면서 반미는 감정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었다. ‘미국에 맞선 나라’라는 이미지는 이슬람 공화국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⑤ 제도화된 반미와 현실적 계산(1981~현재)
1981년 인질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반미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반미는 이미 체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국가 정체성은 ‘무엇에 반대하는가’를 통해 유지되었고, 미국은 그 중심에 놓였다.
이란에서 반미는 외교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 정치의 상징이다. 혁명 체제는 계속해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반미를 통해 설명했다. 반미를 약화시키면 혁명의 의미와 왕정과의 단절선도 함께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이념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란은 미국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국제 금융, 무역, 제재, 군사 균형, 중동의 힘의 구조에서 미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존재다. 이란 지도부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란은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겉으로는 강하게 적대하고, 말로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동시에 물밑에서는 계산을 한다. 직접 대화는 피하더라도, 제3국을 통한 접촉이나 간접 협상은 계속됐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체제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반미는 유지해야 하지만, 국가는 굴러가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이란은 지금도 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반미 기념 행사와 구호는 이 체제의 상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이란의 반미는 오랜 기억, 혁명 이후의 제도, 상징적 사건들이 겹쳐 만들어진 구조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란의 행동은 늘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현실적 대미 손익계산서가 반드시 있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