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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곤 칼럼] 배신을 넘어선 보신의 정치학
  • 민병곤 작가
  • 등록 2025-12-31 21: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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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훈. 연합뉴스

최근 정치인 이혜훈의 행보를 두고 ‘배신’이라는 규정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적 낙인에 앞서, 과연 이 선택에 ‘배신’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배신이란 최소한 신념을 전제로 지키려 했던 가치가 있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저버렸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이혜훈 사태는 배신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이는 단지 개인적 안락과 보신을 좇은 선택일 뿐이다. 어떤 철학이나 대의도 없이, 권력 주변의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찾아 움직인 결과다. 신념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지킬 신념조차 없었다.


역사와 문학 속 배신의 상징들을 떠올려보자. 가롯 유다는 은 30냥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인식했고, 브루투스는 공화정이라는 대의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했다. 파우스트조차 더 큰 진리를 명분 삼아 영혼을 저당 잡히는 고뇌를 거쳤다. 이들 모두는 배신의 아이콘이지만, 적어도 선택의 무게와 책임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이혜훈의 선택은 어제까지 빨강이 최고라더니 오늘은 파랑이 본래 좋았다, 말하는 식의 ‘묻지마 변심’과 다름없다. 그것은 고뇌의 결단이 아니라, 보신적 본능의 발현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장관직’으로 바뀌었을 뿐, 안락에 순응한 본질은 같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데 있다. 봉건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기생하는  ‘기득권 카르텔’이 뿌리 박고 있다. 이들에게 대의란 언제나 개인과 가문의 안위였다. 권력 주변을 맴돌며 민초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 되기에만 몰두했다. 이번 사태는 그런 민낯이 다시 한번 드러난 것이다.


이들은 노골적인 전체주의보다도 더 위험하다. 독재는 적어도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식별되지만, 이들은 살아 있는 권력을 숙주 삼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보이지 얺게 암약한다. 그 권력이 사라지면 또 다른 숙주를 찾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치는 철학의 발현이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들이라면, 정치적 선택 앞에서 일관성과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조차 없다면 이들은 한낱 정치의 탈을 쓴 기회주의자요, 보신주의자일 뿐이다.


보신과 안락에 매몰된 정치인은 우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 정치·사회적 균열이 심화되는 지금, 제2, 제3의 이혜훈이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 줄 것은 이해나 관용이 아닌, 단호한 퇴출이다. 


정치다큐 작가·국민의힘 인천시당 대변인 



◆ 민병곤 작가 


현) 정치다큐멘터리 작가 

현) 국민의힘 인천시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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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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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STONE2026-01-01 04:19:20

    얼굴은 살아온 궤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링컨대통령의 말을 생각하면 탐욕이 낮짝에 너덜너덜하게 붙어 떨어지고 있는 이혜훈 사진이다. 실물을 보면 바로 구역질 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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