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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규 칼럼] 자주와 평화와 효율성의 이름으로 붕괴되는 안보 현상들
  • 박필규 편집위원
  • 등록 2026-02-01 0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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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 아래 감춰진 어둠, 안보의 기생충들을 경계한다


28일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2026년 제1차 전작권 전환 추진평가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2026년 1월28일 국방부는 제1차 전작권 전환 추진평가회의를 개최하며 올해를 전시작전통제권 회복의 ‘원년’으로 공식 선언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회복은 한국군의 독자적 대비태세 강화와 한미동맹의 새로운 발전”이라고 강조하며, FOC(완전운용능력) 검증을 올해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지만, 이러한 선언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빛 아래 감춰진 어둠'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한국 사회의 균열을 빛과 어둠이라는 공간의 대비로 압축해 보여준다. 박 사장네 집은 햇빛이 가득한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을 파괴한 것은 누구도 내려다보지 않는 지하실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은 관리되지 않고, 결국 집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이 영화적 구조는 지금 한국 안보가 직면한 현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오늘날 한국 안보 담론은 평화와 자주 화두가 지배한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주권 회복과 자존의 상징으로 설명되고, 군 조직 개편은 효율성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통합사관학교 논의는 합동성 강화와 미래형 군 인재 양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9·19 군사합의 복원은 평화의 제도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호출되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이상적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처럼 보인다. 외부에 보여주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박 사장네 거실과 닮아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보여주었듯,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안보의 지하실에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외면해 온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전작권 전환을 말하지만, 전면전 상황에서 북한 방공망을 제압하고 종심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핵심 전력은 제한적이다. 전략정찰 자산은 현대전 기준에서 충분하지 않고, 군수와 병참 체계는 장기 소모전에 대비돼 있지 않다. 전시 지휘통제 능력 또한 실전에서 검증된 적이 없다. 

 

자주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정책들이 실제 전쟁 방지와 수행 능력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늘 뒤로 밀려왔고 군 지도부는 양심의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

 

평화의 이름으로 추진된 9·19 군사합의는 긴장 완화를 목표로 했지만, 북한의 반복적인 위반과 군사력 증강 속에서 한국군의 정찰과 감시 능력만 제약하는 비대칭적 구조를 고착시켜 왔다. 현 정부의 9·19 군사합의 복원은 평화의 제도화라는 표현은 듣기 좋지만, 현실을 통제하지 못하는 합의는 안정이 아니라 착시에 가깝다. 이는 위협을 줄이는 장치라기보다 위협을 가리는 장막으로 기능할 것이다. 

 

통합사관학교 논의는 어둠으로 빛을 덮으려는 시도다. 군의 기초는 무기나 장비가 아니라 장교단의 형성과 정체성이다. 육·해·공군 사관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각 군의 작전 문화와 전투 철학, 지휘 전통을 축적해 온 핵심 인프라다. 이를 효율과 합동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겠다는 발상은 겉으로는 합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기초가 흔들리면 상부 구조는 아무리 권위 있고 화려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자주국방을 강조하면서도 방위산업의 핵심 기술은 여전히 해외 의존에 묶여 있고, 수출 통제와 기술 이전의 한계로 전력 현대화는 반복적으로 지연된다. 정보기관의 분석 체계와 독립성 역시 여러 병리적 문제로 신뢰가 흔들리며, 현대전의 핵심인 정보 우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구조적 취약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군수와 병참 체계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평시 비용 절감에 치중한 결과, 장기전 대비 능력이 충분히 구축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이 모든 흐름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수렴된다. 자주, 평화, 효율이라는 이상적 가치의 언어가 실제 군사적 현실을 압도하면서, 지휘와 정찰, 전력과 조직, 군수와 동맹이라는 안보의 핵심 기반이 점진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상징과 명분 아래 서서히 진행되는 해체에 가깝다.

 

기생충의 비극은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안보도 마찬가지다. 전작권 전환을 정치적 상징으로만 소비하고, 군 개편과 통합을 숫자와 효율의 문제로만 다루며, 평화 선언만으로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 순간 우리는 빛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방치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빛은 어둠을 찾아가서 소멸시키지 못하고, 관리되지 않은 어둠은 결국 구조 전체를 삼킨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들은 다시 반지하로 돌아간다. 아버지를 구할 집을 사겠다는 다짐은 아름답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다. 안보도 다르지 않다. 감당할 수 없는 선언은 희망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지금 한국 안보에 필요한 것은 빛을 더 밝히는 수사가 아니라, 지하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어둠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안보는 자존심의 문제도, 정치적 명분의 문제도, 효율성의 문제만도 아니다. 안보는 지하실을 포함한 집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고 조목조목 살피며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는 국가의 최고 영역이다. 겉은 화려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내부가 붕괴된 집은 결국 가장 먼저 무너지듯, 안보 논리와 정책이 같은 원리다. 영화 기생충이 남긴, 그리고 지금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가장 냉정한 안보의 교훈이다. 이 짧은 글로 안보 지도부의 양심에 호소한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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