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공영 ORF방송 온라인판 캡처]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낙인이다.
중국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면 ‘혐중’이 되고, 선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부정선거 음모론자’가 된다. 특정 사건에 대한 해석은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내란’으로 규정된다.
단어는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우려는 혐오로 재해석되고, 혐오는 음모로 확장되며, 음모는 범죄로 단정된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검증이다. 무엇이 사실인지 따지기 전에, 누가 어떤 사람인지가 먼저 규정된다.
그 순간 논쟁은 끝난다.
문제는 이 낙인의 언어가 권력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특정 사안을 ‘내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발언이 아니다. 국가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재판이 진행 중인지, 사실관계가 확정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론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재판은 판단의 과정이 아니라 확인의 절차로 전락한다.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론을 정당화하는 공간이 된다. 무죄추정은 형식으로 남고, 실질은 사라진다.
이것이 반복되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검증보다 규정이 앞서고, 토론보다 낙인이 기준이 된다. 의심은 허용되지 않고, 결론만 공유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을 따지지 않는다. 이미 낙인이 찍힌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전체주의는 특정 이념의 이름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낙인이 제도화되고, 그 낙인이 공적 언어로 승인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법은 그 뒤를 따라오고, 절차는 결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바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입장의 선택이 아니다. 순서의 복원이다.
우려는 검증으로 이어져야 하고, 의문은 토론으로 풀려야 하며, 범죄는 판결로 확정되어야 한다. 그 순서가 지켜질 때만 법은 법으로 기능한다.
그 순서가 무너지면, 남는 것은 하나다.
낙인이 판결을 대신하는 사회다.
낙인이 공식화되는 순간, 그 사회는 이미 방향을 바꾸고 있다.
판결이 아니라 권력이 결론을 내리는 나라에서, 법은 더 이상 기준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