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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형 칼럼] “지금의 대한민국은 박정희 작품”… 5·16혁명 65주년을 맞아
  • 황두형 前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
  • 등록 2026-05-15 15: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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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 흑백사진을 컬러로 변환. 

아테네 민주주의 말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 등 제자 정치인들의 몰락 후 반대파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 되고 아테나 여신과 디오니소스 숭배를 거부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정적 제거 도구로 전락한 도편 추방 제도, 능력을 무시하고 평민들이 유리한 추첨으로 관리를 선출하는 제도와 아테네 민주주의 포퓰리즘의 절정기로 불리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도입된 배심원과 의회에 대한 수당 지급과 아테네 지배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 선동을 위한 극장 연극 무료 관람 등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거부감이 원인이다. 

 

4·19항쟁 이후 대한민국의 혼란상

 

소크라테스는 타협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독배를 받아들인다. 포퓰리즘과 시민들의 탐욕으로 인한 잦은 법체계 변동으로 법치의 근간이 무너지고 존립이 위태로워진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이며 아테네 멸망의 예고다. 

 

타락한 아테네 민주주의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경험한 제자 플라톤은 무지한 대중을 향한 선전 선동과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와 법치 그리고 통제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법치와 통제는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 탐욕만 남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몰락을 경험한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얼마 후 곧 회복된 민주정이었다. 바로 이 민주정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고 결국 그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직간접적인 정치적 경험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장차 철인 왕이 출현하지 않는 한 정치적 타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때부터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세워 철학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전경옥 외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무한 포퓰리즘을 통해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망가뜨리는 정치인들에 대한 경고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자꾸 들먹이는 위정자의 말에 속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을 내세우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말로는 ‘국민을 위해’라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도모해 주는 국가권력의 행사를 가리는 베일이나 연막이었던 사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김영평 외 ‘민주주의는 만능인가’)

 

포퓰리즘과 중우정치로 멸망한 아테네 민주주의 말기 현상이 4·19항쟁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난다. 이승만의 하야 이후 집권한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안정적인 국가의 통치와 경제 개발은커녕 해방 후의 좌우 대립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이 반복되고 끝없는 시위가 전국을 뒤덮어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북한의 재남침 위협이 점증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혼란은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박정희의 5·16군사혁명이 등장한다.

 

5·16은 올 것이 온 것일 뿐

 

박정희의 5·16은 기술적으로 군사 쿠데타이나 내용적으론 한민족 역사의 흐름을 바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을 능가하는 세계 역사상 드물게 성공한 혁명이다. 중국의 속국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한민족 역사의 바닥을 친 조선왕조에서 벗어나 일본의 식민 통치를 거쳐 한민족이 배달국과 고조선,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는 수천 년 만에 맞는 국운 상승기의 시작이다.

 

5·16혁명 직후 시청 앞. 박정희(가운데) 소장이 박종규(왼쪽) 소령, 차지철 대위 등과 서 있다.

3600명에 불과한 박정희의 혁명군이 한강 다리를 넘어 청와대와 육군본부, 방송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혁명을 선포하자 당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친 쿠데타 세력과 반 쿠데타 세력으로 양분된 군대의 통솔권을 가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진압군을 보내지 못하고 미국은 이틀 후 박정희의 쿠데타를 용인한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김종필의 말처럼 박정희의 5·16혁명은 막강한 병력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닌 초라한 규모의 병력이었지만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5·16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한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의 저서 ‘살며 지켜본 대한민국 70년사: 반산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5월16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서울 시민들은 군사혁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반응은 ‘올 것이 왔다’가 대부분이었다. 민주당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 경제 파탄에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고 걱정하던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약 3600명의 혁명군이 박정희 소장의 지휘 아래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여 혁명을 새벽 몇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무혈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왜 가능했을까? 군 장병도 그리고 대부분 국민도 묵시적으로 동의한 구국의 결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4.19 이후 1년간의 상황에 국민의 불만이 높았다는 의미다.” (신승민 ‘숨결이 혁명 될 때’)

 

박정희 집권 후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자동차, 석유화학 단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대덕 연구단지 건설 등을 사사건건 반대하던 야당과 학자, 공무원 등 모든 사람의 패배주의를 물리치고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처절히 행동으로 옮겨 현재의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을 만든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경제원조 자금과 독일의 차관으로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등 인프라를 구축한다. 

 

야당과 대학생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굴욕외교라고 연일 가두시위를 펼친다. 고속도로는 필요 없고 포항제철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를 넘어 일본 자금으로 만들어진 포철은 신일본제철을 능가하는 세계 제일의 제철소가 된다. 입으로 떠드는 공허한 반일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극일’이다. 

 

전쟁 배상금이나 경제 차관을 지원받은 나라 중에 성공적으로 경제 개발을 한 나라를 찾기 쉽지 않다. 대부분 지도자와 권력 주변 사람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M16 자동 소총을 만드는 미국 회사의 중역이 박정희를 찾아가 백만 달러짜리 수표를 내민다. 관례에 의한 리베이트다. 

 

박정희는 수표를 되돌리며 그만큼 소총을 더 달라고 한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 파병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소중한 외화를 사사로이 쓸 수 없다. 미국인 중역이 떠나자 박정희는 집무실 책상으로 돌아가 한여름의 폭염에도 다시 에어컨을 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

 

종북좌파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회주의의 득세, 정의가 패배한 부정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 기적의 역사, 긍정의 힘을 믿는 역사다. 

 

좌파는, 박정희가 아니라 누가 해도 근대화는 했을 거라고 한다. 박정희의 중공업 육성과 수출 위주 산업 정책을 반대하고 농업과 내수 시장을 위한 경공업 진흥을 주장하던 좁은 시야의 사람들이 했을 거라고 한다. 

 

박정희 이전의 한민족과 박정희 시대의 한민족은 같다. 지도자가 달랐을 뿐이다. 작은 조직이든 국가든 지도자에 따라 발휘하는 능력은 천양지차다. 같은 군사를 이순신 장군이 맡으면 연전연승하고 원균이 지휘하면 연전연패한다. 

 

종북좌파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난한다. 경제 발전이 민주화의 초석이다. 경제 발전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으며 전례도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것이다. 김대중 이후 좌파 정권은 대북 퍼주기 논란에 대해 북한의 경제를 살리는 게 인권을 거론하는 것보다 현실적이고 북한 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살피는 거라고 주장한다. 종북좌파는 이 논리를 박정희 정권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박정희 시대는 봉건적 유교 이념의 조선 시대에서 근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존재한다. 조선왕조에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도 왕조시대의 유교적 권위주의와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가 모두에게 남아 있던 시절이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고 집안에서 아버지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절이다. 학부모가 학교 찾아가서 선생님 뺨을 때리고 아버지는 집안에서 왕따가 되는 이 시대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해선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집권했으니 독재라고 한다. 미국이 대통령 임기 8년만 하니 그 이상은 독재인가. 미국도 사선 대통령 루스벨트가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반미를 외치면서 자식들은 미국 유학을 보내는, 역사의식도 철학도 일관성도 없는 무능 무지한 종북 좌파, 그들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사대도 모자라 미국 사대주의까지 보여준다. 미국이 무엇을 하든, 삼선이든 사선이든 종신이든 헌법에 따라 국민이 선택하면 하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와 미군의 베트남전 패배로 인한 공산화, 그리고 미국과 중공의 수교로 인한 국제정세의 급변 속에 박정희는 1972년 전국적으로 선거로 뽑힌 선거인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연임 제한 없는 임기 6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골자로 하는 유신헌법의 채택을 위한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유신헌법은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통과된다. 

 

야당과 대학생들의 지속적인 유신헌법 철폐시위로 사회 불안이 야기되자 박정희는 19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부결되는 경우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투표 결과 79.8%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서울과 부산의 58%와 62%라는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73.1%의 득표율로 박정희와 유신헌법은 재신임을 받는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선포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유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이 민주 체제처럼 취약한 체제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 비상조치의 불가피성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오늘의 성급한 시비나 비방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유구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라는 바입니다.”

 

중화학 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 공업화

 

박정희는 1970년대 안보와 경제의 복합 위기 속에서 유신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그는 야당의 대중 경제론이 근시안적이라 비판하며, 경공업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중화학공업’을 새로운 국가 과제로 천명한다. 이는 무기 자급화를 통한 자주국방과 중화학 제품 수출을 통한 중진국 도약을 목표로 한 것이다.

 

박정희(왼쪽)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 

당시 수구적이며 패배주의적인 야당 정치인과 학자들은, 외자 도입과 재벌 중심의 수출 경제 대신 농업과 수입대체를 위한 중소기업 중심의 자급자족형 내수 공업을 주장하고, 고속도로든 제철소든 조선소든 다 필요 없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는 결국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남미형 종속이론에 종속되어 있었다. 유신은 이런 자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조우석 등이 지은 ‘숨결이 혁명 될 때’에 나오는 오원철 전 경제수석비서관 증언이다.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변질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면(유신 선포가 없었다면) 1970년대의 한국은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으나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 아래에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 개혁을 별개인 것처럼 얘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 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 공업화다. 그게 진실이다. 하나 없이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중화학공업이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그게 굴러가도록 국가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국가 훈련은 없었다. 이걸 무시하는 건 비양심적이다.”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인 박정희

 

박정희가 몇 년 더 집권했으면 자주국방을 위한 핵무기, 장거리 미사일까지 개발을 끝내고 지금처럼 북한 핵과 미사일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이나 한미동맹, 미국의 핵우산을 재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당선된 미국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 국가의 안보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1969년 발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시작하자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나 미국의 방해로 1976년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그 후 비밀리에 지속되던 핵무기 프로그램은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요청으로 폐기한다.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취임 직후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통보하고 레이건은 전임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백지화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미국이 파리를 위해 뉴욕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논리로 핵무기 개발을 강행한다.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이 서로 수정주의자, 교조주의자로 비난하며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련이 중국에 무기와 공업시설 지원을 끊자 안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핵무장 없이는 적의 핵무기 앞에 굴복하거나 핵 대국의 보호라는 자비심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핵무기 개발을 진행한다.

 

4선 국회의원 출신 하순봉은 회고록에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 방문과 주한미군 철군 그리고 미군의 베트남 철군 결정으로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박정희는 1972년 초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지시했으며 1970년대 말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쓴다. 

 

박정희는 1979년 1월1일 청와대 공보비서관 출신 선우연 의원을 불러 1981년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핵무기를 공개한 뒤 바로 하야 성명을 내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나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2년 뒤 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 할 거야.”

 

전두환 집권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박정희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폐기되었으나 전두환은 핵무기 대신 한국형 원자로 기술 개발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전두환은 미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대신 한국형 원자로 기술을 확보하면 핵무기 제조는 훨씬 쉽다는 전문가 의견을 받아들인다. 

 

2000년 원자력연구소는 우라늄 농축 실험에서 70% 농축에 성공하고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90% 농축은 하지 않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하고 사찰을 받는다. 당시 원자력연구소장 장인순의 2026년 4월27일 연합뉴스 인터뷰 내용이다. 

 

“농축 방법을 알았으니 더 진행할 필요성은 없었다. 70%에서 9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원전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시공, 원자로 설계, 운전 능력 등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핵무기 제조 기술은 하이테크가 아니다. 80년이나 된 과거의 기술이다.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원자로 제조보다 쉬운 일이다. 원자로에 100만 개의 부품이 들어가지만, 핵무기에는 2000개도 안 들어간다. 우리는 핵무기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원자력 발전에 가장 기여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분은 1971년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공사를 시작했다. 건설비는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을 보유한 대한민국의 원자력 연구는 이승만 정부에서 시작된다. 1956년 한국은 미국과 ‘비군사적 원자력 사용에 관한 정부 간 협약’을 체결하고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한다.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100여 명의 원자력 유학생을 미국에 보내고 원자력연구소도 만든다. 

 

이승만은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위한 예산 지원을 지시한다. 1959년 원자로 연구소 건설 기공식에서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가 머지않은 장래에 핵폭탄 (atomic machine)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이승만의 원자력에 대한 애착은 핵무기뿐 아니라 1948년 5월 남한 내 전력 수요의 80%를 차지하던 북한의 송전 중단으로 하루 서너 시간 정도로 제한 송전하는 전력난 때문이다.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던 대한민국은 수력발전소와 화력 발전소 건설로 1964년에 겨우 제한 송전을 마감한다. 

 

이승만 정부에서 착공한 연구용 원자로는 1962년 박정희 정권 집권 후 완공되고 1969년 박정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하고 1971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고리1호기가 완성된다. 이후 고리2호기와 월성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함께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도입 협상을 하고 캐나다 CANDU형 원자로 도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압박으로 중단된다.

 

원자력 발전소뿐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최대 먹거리 반도체와 전자 산업의 시작에도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는 전자 산업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한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만들고 해외에서 과학자들을 불러 파격적인 고임금과 아파트를 제공하며 전자 입국의 기초를 닦는다. 삼성전자의 시작에 관한 김종필의 증언이다. 

 

“1967년 말 어느 날 중화학공업 쪽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이병철 회장한테 이제 중화학공업을 좀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좀 물어봐.’ 이 회장을 만나 대통령 말씀을 전했다. 그는 한참을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결심이 섰는지 ‘대통령 뵈러 갑시다.’라며 일어섰다.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내게 말했던 대로 이 회장에게 ‘중화학공업에 손대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회장이 ‘중화학공업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자 박 대통령은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공업 중 하나를 해보십시오’라고 제안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돼서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채택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삼성전자다. 1969년 수원에 삼성전자의 첫 공장이 들어섰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023.12.11. 중앙일보)

 

한민족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그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재자가 생각이 다른 나머지 사람 전체의 침묵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철저한 자유 신봉론자 존 스튜어트 밀 얘기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기술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이 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때가 되기까지는 아크바르(Akbar)나 샤를마뉴(Charlemagne)같은 지도자에게–운이 좋아서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다면–암묵적으로 복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아주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문제의 정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시대에 따라서 답이 항상 다르다. 서로 다른 두 사회가 같은 답을 낸 적이 거의 없다. 한 시대나 사회가 내린 결정이 때로 다른 시대나 다른 사회의 사람에게는 놀라워 보이기도 한다.” (서병훈 역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자유론 On Liberty’)

 

박정희의 5·16은 피로 물든, 그리고 종국에는 실패한 프랑스혁명, 마르크스 레닌의 러시아혁명과 달리 무혈 혁명이며 성공한 혁명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노동이 아닌 지인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한 프롤레타리아와는 무관한 삶을 산 위선적인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폭력 혁명을 위한 선전 선동이다. 

 

“현 사회에서 최하위 계층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공식적인 사회를 이루는 계층의 전체 상부 구조를 폭파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도 없고 똑바로 설 수도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진우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마르크스의 선동은 프랑스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단두대 공포정치를 실시한 로베스피에르의 자유를 위해 폭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연결되며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이 수립한 공산 정권에서 그대로 구현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념은 그가 혁명에 대한 견해를 단계적으로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최종적으로 그의 사상체계 전반에 통합되었다.” (최갑수 역 알베르 소불 ‘프랑스 혁명사’)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혁명군은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뿐 아니라 수만 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반대파 진압을 명분으로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 수십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강간까지 일삼는 공포정치를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집권까지 11년 동안 자유 평등 박애와는 무관한 공포정치와 반란과 내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며 나폴레옹의 독재와 황제 정치의 발판이 된다. 나폴레옹은 집권 후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패한 후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6년 후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 중 사망한 프랑스인이 600만 명이며 노예제를 부활한 나폴레옹은 히틀러에 버금가는 전쟁광,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로 기억된다.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며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베트남, 알제리,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등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식민 통치에 반항하는 수십만 명을 학살한다. 일본의 2차대전 패전으로 베트남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자 프랑스는 옛 식민지 지배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보내 다시 베트남 식민 통치를 시작한다. 

 

공산주의자 호찌민의 민족주의 독립군과 9년간의 전쟁 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며 호찌민에 의한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프랑스 철수 후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베트남에 개입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레닌 이래 글로벌 좌파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혁명으로 찬양하는, 지배 계급의 피지배 계급 착취를 종식시키고 자유, 평등, 박애주의를 실현했다는 프랑스혁명의 역사다. 

 

박정희는 일개 여단 병력에도 못 미치는 3600명의 군대로 무혈 혁명을 완수했으며 혼란스러운 사회와 도탄에 빠진 민생과 경제를 구하고 사리사욕 없이 대한민국 수천 년 역사에 드문 한민족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대혁명,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세뇌된 종북좌파와 그들의 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박정희의 5.16은 플라톤 철인정치의 구현이며 프랑스혁명과 레닌의 러시아혁명을 능가하는 진정한 혁명이다.





◆ 황두형 

 

前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

前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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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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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6-05-15 18:16:44

    대한민국 역사이래,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이후 패망한 나라를 위대한 조국으로 헌신한 위대한 대통령 박정희 영원대대로 국가혁명 그 정신을 기려야 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빨갱이들이 넘쳐나고 중공의 검은자금과 부정선거에 관여한 자 대대손선 공소시효없이 척결해야 하며, 비상대권을 행사한 자의 자리를 찬탈한 범죄자자들 그 죄는 엄중히 물어야 한다. 지난 25년간의 부정선거 민중항쟁 이것은 25년간 이 땅의 백성들을 개돼지로 짓밟아온 기득권세력들을 모조리 몰아내야 하는 국가적사명이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쟁입니다. 아직 정신못차리는 자 들 정신차리기 바랍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이미 25년전부터 무너졌음에도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시는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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