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인하대 교정에 설치됐던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연합뉴스.
광복 80주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윤미향이란 여자의 사면(赦免)이 주는 통증 때문이다.
우리는 윤미향 사면 사건을 통해, 이재명 정권이 우리 국민들을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재명이 우리 국민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받들었다면, 윤미향 사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를 가장(假裝)한 진보 최악의 저질적 행태를 보았다고 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속여먹은 윤미향 전 의원 사면 사건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면한 이재명과 그 일당들의 모습에서 그 사면 이유를 찾아본 사람들은 끔찍한 진실을 보았을 수도 있다.
시인·칼럼니스트 이재명이 정치적 부담과 엄청난 비난을 무릅쓰고 윤미향을 사면해야 했던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그녀의 남편과 가족 일부가 친북활동을 해온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든 거대한 힘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고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친일프레임으로 가두고자 했던 자들은 윤미향을 좌파정권을 이룬 공신(功臣)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이 윤미향을 사면한 두 가지 이유이다.
그리하여 민주당과 진보좌익들의 손길이 닿는 일부 국민들과 학생들은 진보의 그늘에서 조작된 가짜역사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이 바뀌게 되자 진실이 바뀌고, 진실이 바뀌자, 진실을 지키는 정의도 달라졌으며, 달라진 정의에 따라 교육내용도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법의 정의가 무너진 것도 그 원인은 여기에 있다. 판사들이 어린시절부터 잘못된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이재명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판사들. 그들이 자행한 상식이 사라진 판결을 보면서, 필자는 대한민국 교육을 통탄하고 있다. 소위 양심에 의해 판결한다는 자들, 그들은 조작된 진실과 왜곡된 가짜역사를 배우며 성장한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검판사들 머릿속은 자정(自淨)작용을 상실한 무뇌아(無腦兒)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고칠 수 없을 만큼 붉게 세뇌(洗腦)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 국민 보는 앞에서 무소불위의 특검질을 하는 조은석, 민중기 같은 검사들과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사상이 기울어진 불구자들이다.
친일(親日)은 국민정서에 연결된 아주 오래된 반감(反感)이었다. 그 반감에 민주당은 두 명의 인물을 연결시켰다. 바로 이승만과 박정희였다. 이 역시 조작된 정서적 반동(反動)이었다. 윤미향이 위안부 할머니 이용한 것도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이승만과 박정희 두 인물이 이룩한, '대한민국 건국과 중흥'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었다. 그것은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에서 도출해낸 일반화된 결론이었다. 그러나 진보는 이 객관적 평가를 뒤집어버렸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악한 반(反)민주 역적이자 친일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승만은 참혹한 6.25의 폐허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조국을 수호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진보는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통일전쟁을 방해한 자로 이승만을 지목하고 친일(親日)의 굴레를 씌웠다. 거기에 맥아더장군도 반(反) 통일세력으로 끼워 넣고 동상마저 파괴하려 하였다. 백선엽 장군도 동포를 살해한 반역자로 매도하였다. 6.25에 대한 진실을 북한의 시각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승만은 강력한 반일주의자였다. 따라서 패전 후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한반도 식민지배에 따른 보상 문제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이승만은 대마도 반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를 방해한 것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포를 살상케 하였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들어냈으며,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대마도 반환 문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부흥의 길을 걷는다. 따라서 대마도를 잃어버리게 하고, 오히려 일본을 살린 자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이 모든 사실이 진실의 힘을 잃고, 오히려 김일성을 통일전쟁을 일으킨 위인으로 추앙하는 민주당은 누구이겠는가. 더 나아가 오히려 이승만에게 친일을 뒤집어 씌운 자들이 친북주의자이면서 대한민국의 진보라는 것을, 그들이 지금 민주당 세력 안에 모여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했으며, 휴전협정을 승인하는 대가로 미군 주둔을 끌어내어 안보롤 보장받은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페허가 된 대한민국에 일년 예산의 절반을 원조해 주었고, 그 외에도 막대한 미군주둔 비용은 우리 사회 경제를 일으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진정으로 이승만은 안보와 경제를 이끌어낸 구국(救國)의 영웅이었다.
이승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었을 때 경험한 공산당원들의 무도한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른이고 뭐고 마구 대드는 포악함은 물론 자유시 사변에서 일제와 레닌의 합작을 지켜보았고,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을 암살한 자들도 일제에 포섭된 공산당원들이었음을 지켜보았다. 이승만은 그 모든 걸 보고 공산주의의 해악(害惡)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국제 감각을 익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을 알고 세계를 알았던 유일한 정치지도자는 오직 이승만뿐이었다. 여러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오직 이승만이 외교를 알았다. 미국이 골머리를 앓던 분이었다. 그렇게 이승만은 민족의 소중한 외교자산이었고, 그 어려운 시기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노력한 한국인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이승만 체포에 30만달러(현재 가치 약 50억원)라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었다. 당시 독립운동가 중 백범 김구선생 1차 현상금이 20만달러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하였다. 해방 후, 평소 미국의 명령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승만의 귀국이 가로막혀 있을 때, 맥아더 장군만큼은 그의 반공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하였다. 맥아더로 인해 이승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참혹한 6.25를 이기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였다.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설계자였다.
민주당과 진보좌익들은 6.25 때, 이승만의 부산 피난을 ‘백성을 버리고 떠난 도주’로 조롱하고 있으나, 어느 전쟁에서든 한 나라의 수장(首長)이 포로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일은 없었다.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 김일성의 포로가 되었다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당 진보인사들은 종종 이승만 독재를 말하곤 한다. 그러나 독재는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이기붕 이하 곽영주 같은 자들의 소행이었을 뿐이다. 부정선거 역시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린 이기붕과 권력자들의 소행이었다. 안타깝게도 인(人)의 장벽에 가로막혀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불운한 분이었다.
이승만은 4.19의 함성을 듣자마자 곧바로 하와이로 떠났다. 이때 이승만은, ‘국민이 내려가라면 내려가야 한다’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슬픈 민주주의자의 언어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진보좌익들은 이승만을 친일파이자 독재자로 비난하고 있었다. 역사가 진실 위에 진보라는 붉은 탈을 뒤집어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영면(永眠)할 때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한 할아버지였고, 영원한 민족주의자였다. 따라서 이러한 이승만을 친일파라 한다면, 윤미향에게 면죄부를 준 너는 무엇이겠는가. 다시 묻자, 너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