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청해부대 48진 왕건함. 정부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방향은 결정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부인에도 구체적인 파병 검토 보도가 잇따랐다. [사진=연합뉴스·해군 합성]
이재명 정부가 호르무즈해협 파병을 검토하고 있으며 조만간 국회에 파병동의안을 제출할 것이라는 보도가 3일 저녁 잇따라 나왔다.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 기뢰 탐지·제거 전력 등 검토 중이라는 자산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청와대는 최초 보도가 나온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파병 방향을 정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며 결정된 것은 없다”고 부인했다. 파병은 결정되지 않았다는데 정부와 군의 복수 소식통은 전력 구성과 파견 시기, 국회 동의 절차까지 언론에 전했다. 자연스러운 취재 결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핵심은 파병 검토 여부가 아니다. 중동 정세가 급변하고 미국이 한국의 역할을 요구해온 만큼 정부와 군이 여러 대응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왜 정기국회가 막 시작된 시점에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민감한 군사 계획이 여러 언론을 통해 한꺼번에 공개됐느냐다.
‘노 땡큐’ 답 들었다는 트럼프와 한국 정부의 부인
트럼프는 지난 8월 17일 이재명과 최근 통화했다며 이란 문제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노 땡큐(No, thank you)”라는 답을 들었다고 공개했다. 한국 정부는 트럼프가 언급한 최근 통화와 거절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정상 간 통화는 비공개가 기본이며 공개는 양국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다. 따라서 5월 17일 통화가 마지막으로 공개됐다는 이유만으로 이후 통화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구나 트럼프는 8월 19일 같은 내용을 다시 밝혔고, 30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는 한국의 비협조를 거론하며 “우리는 그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한국의 대이란 비협조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3월 이후 여섯 차례다. ‘여섯 차례 지원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가 한국의 태도에 불만을 거듭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번 파병설을 곧바로 이재명의 ‘백기’로 해석하기도 어렵다. 청와대는 트럼프의 발언이 나온 8월 17일 이미 미국과 실질적·군사적 기여 방안을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한국이 군사적 기여 가능성을 검토한다는 사실을 공식 협의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3일 국내 언론에는 초계기와 군수지원함, 기뢰 제거 전력, 국회 동의안 제출 시점까지 등장했다. 미국에 검토 사실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기존 외교·안보 채널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번 보도가 미국뿐 아니라 국내 정치권과 여론을 향한 메시지였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복수 매체에 동시에 등장한 같은 정보
최초 보도는 3일 오후 7시38분 JTBC에서 나왔다. JTBC는 복수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정부가 파병 쪽으로 기울었으며 국회 동의안을 조만간 제출할 것이라고 전했다.
청와대는 오후 9시29분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5분 뒤 MBC는 복수의 군 소식통을 근거로 유사한 내용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오후 10시15분 복수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연내 파병과 이달 중 동의안 제출 가능성을 전했다.
서로 다른 매체가 짧은 시간 안에 정부와 군 소식통을 통해 비슷한 전력과 일정, 절차를 보도했다. 청와대 역시 ‘파병 논의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파병 방향이 결정됐다’는 부분에만 선을 그었다.
우연히 동일한 취재가 겹쳤다기보다 정부 또는 군 내부에서 일정한 정책 정보가 의도적으로 제공됐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한다.
다만 정보를 제공한 주체가 청와대인지, 국가안보실인지, 국방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목적 역시 실제 정책 전환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인지, 트럼프를 달래기 위한 보여주기인지, 국내 국면전환용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한미일보는 4일 오전 9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에게 관련 내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위 실장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고 답했다.
정기국회 국면전환 카드인가
보도 시점은 정치적 의심을 키운다. 정기국회는 9월 1일 시작됐다. 개각 후보자들을 둘러싼 논란과 이재명 지지율 하락, 중단된 형사재판 재개 요구, 부동산·경제정책 혼선 등 정부에 불리한 현안이 한꺼번에 국회 의제로 올라오는 시기다.
이때 파병동의안이 등장하면 국회의 시선은 단숨에 호르무즈로 옮겨간다. 한미동맹과 국익, 장병 안전, 전쟁 개입 여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다른 정치 현안을 빨아들일 수 있다. 실제 파병이 확정되지 않아도 ‘검토 중’이라는 보도만으로 의제 전환 효과는 발생한다.
국회 동의가 필요한지는 파견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기존 청해부대의 승인된 작전 범위와 임무 안에서 우리 국민과 선박을 보호하는 활동이라면 별도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신규 소해전력이나 초계기·군수지원함을 투입하거나 다국적 작전에 참여한다면 기존 임무의 범위를 벗어나 국회 동의가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 국방부도 기존 작전 범위와 임무를 벗어나는 활동에는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결국 파병설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남는다.
실제 정책 전환을 위한 여론 탐색, 트럼프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남북 문제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대미 신호, 정기국회 초반 국내 정치의 의제를 돌리기 위한 국면전환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정황은 적어도 대미 신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이미 한국이 군사적 기여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청와대는 구체적인 파병 결정은 부인했다. 그런데 국내 언론에는 투입 전력과 일정, 국회 동의안까지 상세하게 등장했다.
때문에 정기국회 초반 국내 정치 의제를 전환하려는 목적이 함께 있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파병은 장병의 생명과 국가안보, 헌법상 국회의 권한이 걸린 중대한 결정이다. 정권에 불리한 현안을 덮거나 외교적 체면을 세우기 위한 정치 도구로 활용돼서는 안 된다.
정부가 파병설을 부인하는 데서 그칠 일이 아니다. 어떤 방안을 누구와 협의했으며, 결정되지 않은 군사 정보가 어떤 경위로 여러 언론에 전달됐는지 밝혀야 한다.
‘호르무즈 파병설’ 보도 타임라인 * 8월 30일(미국 현지시간) 트럼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란 지원 거절 거론, “기억할 것”이라고 발언 * 9월 3일 오후 7시38분 JTBC, 정부가 파병 쪽으로 기울었으며 국회 동의안 제출 예정이라고 보도 오후 9시29분 청와대, “파병 방향이 결정됐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 오후 9시34분 MBC, 복수의 군 소식통을 인용해 초계기·군수지원함·기뢰 대응 전력 검토 보도 오후 10시15분 동아일보, 연내 파병과 이달 중 동의안 제출 가능성 보도 * 9월 4일 새벽 로이터, 한국 언론 보도를 인용해 국제 배포. 별도의 독자 취재나 미국 정부 관계자 인용은 확인되지 않음. 오전 9시 한미일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에게 통화 시도. 오전 10시 현재 미국 정부의 공식 반응 없음 ※ JTBC 최초 보도 시각은 미국 워싱턴 기준 3일 오전 6시38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