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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진보로 착각하다… 파탄의 출발 [松山 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①]
  • 松山 시인
  • 등록 2025-12-28 14: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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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 경험의 분노… 일제에 맞선 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
  • 진보를 결과 아닌 의도로 판단하는 습관… 인권·자유 뒤로 밀려
  • 북한을 진보로 착각한 판단… 사실보다 신념을 앞세운 선택

1945년 부산의 미군 진주 환영 시가행진 [사진=한국영상자료원]

1945년 8월, 해방은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공백이었다. 국가가 사라진 자리에 질서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 공백기에 한국의 좌파, 특히 이후 ‘종북 좌파’로 불리게 될 계열이 저지른 첫 번째이자 결정적인 오류는 북한을 ‘진보’로 오인한 것이었다. 이 그릇된 판단은 이후 80년을 관통하는 정치적·도덕적 파탄의 출발점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는 소련 군정(1945~48) 아래 놓였다.  소련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빠르게 행정·치안·선전 체계를 장악했고, 1945년 10월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김일성은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질 권력은 소련 군정과 그 정치적 후원에 의해 형성되었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토지개혁과 기업 국유화가 단기간에 단행되었다. 이 급진적 조치들은 남한 좌파에게 ‘북은 개혁을 실행하는 진보, 남은 기득권에 묶인 반동’이라는 도식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北 장악한 김일성… 문제는 권력의 성격

 

문제는 속도와 형식이 아니라 권력의 성격이었다. 북에서 진행된 개혁은 다원적 합의나 시민의 자유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반대 정파는 숙청되었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1946년부터 1948년 사이 북에서는 공산당 일당체제가 사실상 완성되었고,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권력은 김일성 개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한의 좌파는 이 체제를 “미완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완성형 진보”로 착각했다.

 

이 착각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식민지 경험의 분노가 판단을 흐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와 폭력적 숙청은 ‘과정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둘째, 이념의 단순화였다. 반제, 반미, 반자본이라는 표지가 붙으면, 자유의 억압과 인권의 말살은 뒤로 밀렸다. 진보를 결과가 아니라 의도로 판단하는 습관이 이때 굳어졌다.

 

北을 진보 모델로 삼은 좌파


남한에서는 미군정(1945~1948) 아래 혼란과 갈등이 이어졌다. 좌우 대립, 경제난, 치안 불안이 중첩되자 일부 좌파는 북의 ‘질서’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자유의 대가를 치르는 질서였다. 


북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할 수 없는 체제로 빠르게 고정되었고, 권력 비판은 곧 반국가 범죄가 되었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북을 진보의 모델로 삼은 선택은, 이후 한국 좌파가 민주주의와 거리를 두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1948년 이후 이 오인은 되돌릴 기회를 여러 차례 가졌다. 한국전쟁(1950~1953)은 그 체제가 어떤 성격의 권력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일부는 남침의 책임을 흐리거나, 폭력을 ‘역사의 필연’으로 설명했다. 최초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왜곡을 낳았다. 한 번 ‘진보’로 규정한 대상은, 어떤 증거가 쌓여도 재검토되지 않았다.

 

진보는 변화의 방향이지, 특정 체제의 면허가 아니다. 자유와 책임, 권력의 견제와 시민의 권리를 결여한 체제는 어떤 개혁을 수행하더라도 진보가 아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진보로 착각한 판단은 단순한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사실보다 신념을 앞세운 선택이었다. 이 선택을 성찰하지 않는 한, 종북 좌파의 언어는 언제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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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4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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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31 16:47:32

    정치적 격변기의 암울함이 컸던
    시절이라 보이고요.
    진보라는 고급 단어를 이해하는 구한말
    이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답이 없었던 제국주의 시대
    라고 생각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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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SKim33162025-12-30 06:04:12

    한국이 희망이 없는 이유는 기득권층의 목적이 나라를 영원히 낙오된 상태로 유지하려는 데 있고 많은 국민이 이런 상황속에 안주하기를 원한다는 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은 변화와 경쟁을 통해 삶의 질의 향상을 꾀하기 보다는 그저 아무 노력도 안하고 모두가 똑같이 위에서 나눠주는 것이나 받아 먹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북한 같은 쌩 지옥이 아무 문제없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도 한국인들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퇴보적인 민족성 때문이다. 로마니아의 차우체스쿠는 북한같은 체제를 만들려다 사람들에게 맞아죽었지만 그보다 더한 폭정아래서도 북한 주민들이 말없이 있는 이유를 우리는 체제가 아닌 민족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독려하고 일깨워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퇴보적인 민족성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려다가 암살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솔까, 우리민족의 민족성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수동적이고 퇴보적 경향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전라도가 이런 악평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가장 강하고 경상도 사람들, 특히 경상북도 사람들이 가장 덜하며 그래서 대구 출신의 박정희와 그 주변 경상북도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이 가장 크게 발전을 했지만 그 산업화 기간 내내 전라도 사람들은 이러한 산업화에 극렬히 저항을 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가 결국 선진화 된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버리게 된 것이다.
    남의 탓을 할 게 아니라 나라가 이렇게 되도록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자들이 이끄는 인간 기생충 집단의 악의적인 거짓말로 가득찬 선동에 쉽게 흔들렸던 우리 민족의 모자란 민족성을 우선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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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30 01:27:53

    초창기 종북좌파의 성격을 잘 요약 정리해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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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29 21:10:33

    축하드립니다 정선생님! 항상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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