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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허위정보 규제가 기록의 자유를 위협한다
  • 한미일보 편집국
  • 등록 2025-12-31 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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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국무부 우려… 기록을 남기는 것이 위험해지는 법적 불확실성
  • 과거와 미래 모두에서 기록이 안전하지 않게 되는 구조
  • 현대판 분서갱유 논란… 언론·플랫폼, 기록의 ‘자산 → 부채’ 전환

한 홍콩 여성이 2020.7.4일 공공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찾고 있다. 홍콩보안법 시행 이후 공공도서관에서는 조슈아 웡을 비롯한 주요 민주화 인사들의 저서가 모조리 사라져 대출할 수 없다.[AFP=연합뉴스] 

과거의 판단도, 미래의 기준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이른바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에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논란의 초점은 흔히 표현의 자유나 검열 여부로 좁혀지지만 사안의 본질은 간단하지 않다. 

 

쟁점은 누가 허위를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그 판단이 언제까지 유효하냐는 문제다. 다시 말해, 기록과 책임의 ‘시간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개정안은 형식상 사전 검열을 두지 않는다. 행정기관이 직접 콘텐츠 삭제를 명령하는 규정도 없다. 

 

대신 허위·조작 정보의 개념을 법률로 정의하고, 고의적 유통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한다. 

 

겉으로 보면 사후적 민사 책임 강화다. 그러나 실제 작동 방식에서는 판단의 중심이 사법부에서 벗어난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추상적인 허위 개념이 결합되면, 언론과 플랫폼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기 어렵다. 

 

소송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삭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 과정에서 허위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판결문이 아니라 플랫폼 내부 규정과 리스크 관리 논리가 된다. 

 

국가는 직접 검열하지 않지만 판단은 사법 절차 밖에서 이루어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책임의 계속성이다. 

 

이 법은 하나의 게시물에 대해 한 번 판단하고 끝나는 구조가 아니다. 정보가 남아 있는 한 ‘유통 중’이라는 이유로 현재의 위법 상태로 해석될 수 있고, 과거에 작성된 기록물이라 하더라도 오늘 누군가가 피해를 주장하면 다시 책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형벌의 소급 적용은 아니지만, 과거 기록을 현재 기준으로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는 구조가 열린다.

 

여기서 법 질서의 시간성이 흔들린다. 

 

단지 미래의 판단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차원이 아니다. 이미 사회적·법적 판단이 내려졌고 종결된 기록까지도 현재의 피해 주장에 의해 다시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이는 항소나 재심과 같은 절차적 재판이 아니라, 판단의 확정력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기록은 과거에 머물 수 없고, 언제든 현재의 기준으로 다시 책임의 대상이 된다.

 

이 구조가 고착되면 기록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기록은 검증과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법적 위험으로 전환될 수 있는 부담이 된다. 언론은 아카이브를 정리하고, 플랫폼은 상시 차단 체제로 이동하며, 연구자와 시민은 과거 기록의 인용을 주저하게 된다. 판결이 아니라 삭제가 문제 해결 방식이 되는 사회다. 

 

이것이 ‘현대판 분서갱유’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오늘날의 분서는 책을 불태우는 방식이 아니라,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위험해지는 구조에서 시작된다.

 

이제 가장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허위정보를 쓰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답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

 

이 법의 문제는 허위를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에서 기록이 안전하지 않게 되는 구조에 있다. 

 

이미 과거에 작성돼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사회적·법적 판단까지 거친 기록조차도 오늘의 피해 주장에 의해 다시 책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동시에 현재는 문제가 없더라도, 미래의 기준 변화에 따라 문제가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기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지 않다.

 

이처럼 과거의 판단은 끝나지 않고, 미래의 판단은 예측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명확해진다. 

 

정확하게 쓰는 것보다,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보다,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해진다. 

 

이것이 허위정보 규제가 단순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기록의 존속과 민주사회 법 질서의 시간성을 위협하는 문제인 이유다. 

 

검열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도 끝나지 않고 미래도 불확실한 사회에서, 기록은 스스로 사라진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진짜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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