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28일 판문점에서 열린 첫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블랙시어 브라이언(왼쪽) 미 육군 소장과 리상조 조선인민군 소장이 신임장을 교환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총성이 멎자 많은 사람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전은 군사적 중단이었을 뿐, 사상 전쟁의 종료 선언은 아니었다. 특히 종북 좌파 계열에게 정전은 패배의 인정이 아니라 전술 변경의 출발점이었다.
전쟁 기간 남로당 계열 조직은 사실상 궤멸됐다. 지도부 다수는 사망·월북·체포로 사라졌고, 공개 조직망은 붕괴됐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노선 포기 선언이나 사상 전환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수사 기록과 재판 판결문 어디에도 “우리는 잘못됐다”는 문장은 없다. 대신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표현만 반복됐다. 이 문장이 1950년대 종북 좌파의 핵심 전략을 요약한다.
1. 1953~1954년: 공개 활동의 종결과 지하화의 시작
정전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치안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53년 8월 내무부는 각 도 경찰국에 좌익 잔존 세력 일제 단속 지침을 하달했다. 1954년에는 국가보안법이 개정되어 처벌 범위와 수사 권한이 강화됐다.
1954년 서울 광화문 일대.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경찰 통계에 따르면 1953~1955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인원은 연평균 수천 명 규모였다. 이 수치는 전쟁 이전보다 낮았지만, 공개 활동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았다. 이는 종북 좌파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잔존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대표적 사례가 1954년 서울·인천 지하 세포 사건이다.
검찰 수사 기록을 보면, 이 사건의 피의자들은 정당 조직도, 무기 보관도, 전단 인쇄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 남로당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며 간헐적으로 접촉했다.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진술은 공통적이다. “조직은 없다. 그러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조직 해체와 노선 유지가 동시에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2. 1954~1956년: 언어를 바꾼 잠복, 노선은 그대로
1950년대 중반 종북 좌파의 가장 큰 변화는 행동이 아니라 언어였다. 수사 기록과 정보 보고서를 보면, ‘혁명’ ‘무장 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표현은 거의 사라진다. 대신 ‘평화’ ‘중립’ ‘민족 자주’ ‘반전’ ‘재건’이 등장한다.
1948년 9월2일 개막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모습. 남로당의 수장 박헌영(가운데)과 북로당의 수장 김일성이 표결에 참여하고 있다. 박헌영 월북 후 한국의 종북 좌파는 지하로 숨게 된다.
이 변화는 공개적으로 적발되지 않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다. 예를 들어 1955년 부산 항만 노동 현장에서는 임금 체불과 주거 문제를 둘러싼 집단 항의가 이어졌다.
경찰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치 구호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배후 인물 중 일부는 과거 좌익 전력이 확인됨.”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정치적 목표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말을 바꾼 것이 아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말을 바꾼 것이다. 생활 문제를 앞세우되 그 해석의 방향은 반정부·반미로 고정됐다.
3. 교육·학술 공간: 침묵 속의 전파
정당과 언론이 강하게 통제되던 1950년대 후반, 상대적으로 느슨한 공간이 있었다. 대학과 학술 영역이다.
서울대, 연희대(현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주요 대학에서는 공개 정치 활동이 금지됐지만, 독서회·번역 모임·학술 토론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1956년 문교부 내부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일부 학술 모임에서 특정 사상에 편향된 해석이 반복되나 명시적 위반은 포착되지 않음.”
이 문장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직접적인 위반은 없지만, 해석의 방향은 고정돼 있었다. 마르크스·레닌 원전은 직접 다뤄지지 않았다. 대신 해외 좌익 사상가의 해설서, 사회 비판적 번역물이 순환했다. 이는 노선을 유지하되 표면을 합법화한 전형적인 잠복 방식이다.
4. 국제 사건에 대한 침묵: 1956년 헝가리 사태
1956년 헝가리에서 소련군이 무력 개입을 감행하자, 국제 공산 진영 내부에서도 큰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한 종북 좌파 계열의 공개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다. 비판도, 옹호도 없었다. 침묵이다.
이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어느 쪽으로 말하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부적으로는 “지금은 장기전”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 시기부터 즉각 행동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조직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는다.
5. 1958~1960년: 잠복의 안정기와 연결자의 시대
195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종북 좌파의 잠복은 안정기에 들어간다. 체포 위험을 줄이는 요령, 연락망을 느슨하게 유지하는 방식, 공개 발언을 삼가는 관행이 축적됐다. 이때 핵심 인물은 지도자가 아니다. 이름이 기록에 잘 남지 않는 연결자다.
이 연결자들은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을 잇는다. 정치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석의 방향은 유지한다. 이 방식은 1960년 전후 급격한 재등장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된다.
자유주의 우파의 평가
자유주의 우파의 시각에서 1953~1960년은 공백기가 아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노선을 유지한 채 잠복한 시기다. 공개 투쟁의 중단을 사상 전환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록과 맞지 않는다. 침묵은 후퇴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었다.
전쟁은 정전으로 멈췄다. 그러나 이념은 휴전하지 않았다. 총이 사라진 자리에 말이 남았고, 말이 사라진 자리에 의도가 유지됐다. 1953~1960년은 그 의도가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집요하게 이어진 시기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