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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956 북한 숙청에 대한 침묵 [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⑫]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17 11:5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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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헌영 제거와 남로당 잔존 세력의 외면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이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장 정원에서 환담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전선의 총성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총성은 그때부터 더 또렷해졌다. 전쟁이 멈춘 자리에, 권력의 회계(會計)가 시작됐다.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야 했고, 전쟁 기간 억지로 봉합해둔 당내 계파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 표적이 된 인물이 박헌영이었다. 

 

박헌영은 1945년 해방 직후 남한에서 공산당 조직을 재건한 핵심 인물로 출발해, 이후 북으로 올라가 노동당 지도부에 합류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남로당 계열(남한 노동당 출신)” 전체와 함께 숙청의 중심에 놓였다. 박헌영이 무너진 것은 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김일성이 ‘전쟁 실패의 책임’과 ‘당내 경쟁자 제거’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처리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종북 좌파는 이 대목에서 침묵한다. ‘해방’ ‘통일’ ‘진보’를 입에 올리던 세력이, 북한에서 벌어진 대규모 숙청과 공개 재판, 처형과 강제 실종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었다는 표현도 온건하다. 그들은 이 사건을 알면서도 외면했고, 모른 척했으며, 어떤 경우엔 ‘필요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1953년 8월: “전쟁의 책임자”를 만들어내는 작업

 

박헌영 숙청은 정전 직후 급가속한다. 여러 연구와 정리 자료들은 박헌영이 1953년 8월3일 체포되었다고 적는다. 

 

날짜가 갖는 의미가 크다. 정전협정(1953.07.27.) 이후 불과 며칠 만에 “내부의 적”을 확정하고, 당과 국가기구를 동원해 제거 절차를 밟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사법”의 외피를 적극 활용했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박헌영을 당에서 축출하고, 군사재판(최고재판소 산하 군사재판부가 관여한 것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을 통해 ‘미제 간첩망’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혐의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북한 체제에서 혐의는 도구다. 전쟁 패배의 정치적 비용을 지도자에게서 떼어내어, 숙청 대상에게 덮어씌우는 장치다.

 

이 장치의 핵심 문장 하나가 “미국 스파이”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규정함으로써, 전쟁 실패를 ‘전략·지휘의 오류’가 아니라 ‘배신자의 공작’으로 바꿔치기했다. 

 

CIA가 1950년대에 작성해 공개한 보고서들에서도, 1953년 전후 북한 지도부가 남로당·국내파를 집중적으로 제거하는 흐름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문서가 완전무결한 진실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북한 내부에서 실제로 대대적 숙청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 자체는 여러 갈래 자료가 서로 맞물리며 지지한다.

 

1955년 12월: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이라는 연출

 

박헌영 사건은 1953년에 체포로 끝나지 않는다. 1955년 12월, 박헌영은 최고재판소의 “특별재판(특별 회기)” 형태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1955년 12월15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숙청되기 직전 가족과 함께한 박헌영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그리고 며칠 뒤 처형이 있었던 것으로 적는 자료도 있다. 예컨대 12월18일 처형으로 정리하는 서술이 존재하지만, 사망 날짜는 자료에 따라 “확정 곤란”으로 남아 있다. 

 

바로 이 “확정 곤란” 자체가 북한 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공개 재판으로 공포를 유통하되, 최종 처분의 흔적은 지워 남겨두는 방식. 이후 북한은 “공개 재판”을 점차 줄이고, 사람을 조용히 사라지게 만드는 방향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행정·사법 제도 측면에서도 눈여겨볼 점이 있다. 북한은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같은 제도를 활용해 “국가가 법에 따라 단죄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재판의 실질은 당의 결론을 법정이 받아 적는 형태였다. 박헌영 재판은 “사법 독립”이 아니라 “사법의 동원”이었다. 

 

이 지점에서 종북 좌파의 침묵은 더 비열해진다. 남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나 절차적 정당성을 말하던 이들이, 북한에서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장면에선 말을 거둔다. 입 밖으로 내면 자기 논리의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박헌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로당 잔존 세력 “전체”의 처리

 

박헌영 제거는 개인 처형의 문제가 아니라 남로당 계열 전체를 ‘전쟁 책임 집단’으로 규정하고 지워버리는 과정이었다. 남로당 출신 간부들은 전쟁 기간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그만큼 김일성에게는 잠재적 경쟁자였다. 

 

김일성이 구축하려던 체제는 ‘항일 빨치산’ 경력을 중심으로 한 단일 서열 체제였다.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의 독자적 조직 경험과 인맥은 그 체제에 불순물이었다.

 

이때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다. 허가이(소련파 계열) 같은 인물의 급사·자살 처리, 남로당계와 국내파에 대한 연쇄 숙청, 그리고 1956년의 ‘8월 종파 사건’으로 이어지는 계파 청산이 한 줄로 연결된다. 즉, 박헌영 사건은 대숙청의 일부일 뿐이다. 

 

여기서 종북 좌파가 자주 쓰는 회피 논법이 있다. “스탈린 시대엔 다 그랬다” “전후 혼란기라 불가피했다” 같은 말이다. 이런 말은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척하지만, 결국 책임을 돌리는 기술이다. 

 

남한의 종북 좌파는 이 논법을 북한에만 관대하게 적용한다. 남한의 사건엔 끝까지 도덕 재판을 하면서, 북한의 숙청과 처형은 “역사적 사정”으로 정리한다. 이것이 침묵의 구조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침묵의 재확인

 

박헌영 제거가 남로당 계열 청산의 신호탄이었다면, 1956년 8월의 사건은 소련파·연안파까지 포함한 당내 반대 세력의 광범위한 정리였다.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3기 2차 전원회의(1956년)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권력 집중을 비판하려던 시도가 좌절되고, 이후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여기에도 “행정 문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소련과 중국의 반응, 북한 내부의 보고, 회의록 계열 문서들이 시간이 지나며 공개·소개되면서, 단순한 ‘내부 소문’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더 분명해졌다. 

 

특히 윌슨센터(CWIHP)가 소개한 1956년 관련 문서 연구는, 전후 북한에서 정책 노선·개인숭배·계파 갈등이 어떻게 폭발했는지를 문서 기반으로 보여준다. 

 

이쯤 되면 종북 좌파의 침묵은 “몰랐다”로 설명하기 어렵다. 1950년대 후반, 해외 공산권 내부에서도 북한의 권력 투쟁은 일정 부분 알려졌고, 시간이 흐르며 문서도 쌓였다. 

 

그런데도 남한의 종북 좌파는 북한을 ‘정당한 혁명국가’로 묘사하는 수사를 유지하기 위해, 박헌영·남로당 숙청을 역사 속 ‘잡음’으로 처리했다. 

 

박헌영이 무엇을 했든 간에, 절차도 증거도 공개되지 않는 체제에서 “간첩” 딱지 하나로 생사를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선, 최소한 같은 강도의 분노가 나와야 논리적 균형이 맞다. 그러나 그 균형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우상이다.

 

“반제”와 “통일”을 말하던 입이 멈추는 이유

 

종북 좌파가 박헌영 사건을 외면한 이유는 박헌영 숙청을 정면으로 다루면, 그들이 붙들던 몇 가지 핵심 전제가 붕괴한다.

 

첫째, “북한은 해방 이후 정의로운 질서를 세웠다”는 전제가 깨진다. 정전 직후 곧바로 내부 숙청을 가동하고, 최고 권력자가 ‘패전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재판을 연출해 공포를 유통하는 체제는 ‘정의’와 거리가 멀다.

 

둘째, “북한은 민족(혹은 통일)의 대표”라는 전제가 흔들린다. 박헌영은 남쪽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북한이 정말 남북 전체의 대표를 자처한다면, 그 대표성의 일부를 구성하던 남로당 계열을 이렇게 다루는 방식은 설명이 안 된다. 북한이 제거한 것은 ‘적’이 아니라 ‘동지’였기 때문이다.

 

셋째, 남한 종북 좌파 자신의 도덕이 붕괴된다. 남한 사회의 문제를 비판할 때 그들은 ‘인권’ ‘절차’ ‘국가폭력’ 같은 말을 쓴다. 그런데 북한의 숙청 앞에서는 그 말들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기준이 보편이 아니라 진영이었다는 사실이다.

 

“침묵”의 구체 사례: 문제를 ‘용어’로 바꾸는 기술

 

종북 좌파의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다. 더 교묘한 방식이 있다. 사건을 “용어”로 바꾸는 것이다.

 

박헌영 숙청은 “권력 투쟁”이라는 단어로 축소된다. 남로당 잔존 세력 제거는 “노선 갈등”이라는 말로 희석된다. 

 

1956년 사건은 “종파 문제”로 정리되어, 결국 ‘조직 내부의 사소한 충돌’처럼 처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체포, 강제실종, 처형, 가족 연좌(연결 처벌)로 이어지는 체제 운영 방식의 핵심 고리였다. 

 

또 하나의 기술은 “남한 이야기로 덮기”다. 북한의 숙청을 말하려 하면, 곧바로 남한의 과거사로 화제를 돌린다. 남한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금지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비교의 방식이다. 남한의 사건은 끝까지 파고들어 “국가의 원죄”로 만들면서, 북한의 숙청은 “그럴 수도 있다”로 넘어간다. 이 비대칭이 바로 종북 좌파의 정체다.

 

박헌영 제거가 남긴 정치적 효과: 김일성 체제의 완성 재료

 

박헌영 제거는 김일성에게 세 가지 효과를 줬다.

 

첫째, 전쟁 책임의 방향을 바꿨다. 김일성이 전쟁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과의 협의 문서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여러 경로로 소개되어 왔다. 그런데도 전쟁의 결과를 내부 배신 탓으로 돌리면, 지도자의 판단 실패가 ‘음모의 피해’로 포장된다.

 

둘째, 남로당 계열의 조직 기반을 제거해 당내 단일 서열을 강화했다.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의 독자성은 김일성에게 불편한 경쟁이었다. 그 경쟁을 제거한 뒤, 김일성은 소련파·연안파와의 갈등 정리(1956년)를 통해 거의 완전한 독점으로 나아간다. 

 

셋째, 공포를 제도화했다.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같은 외피는 그 공포가 “국가 공식 절차”로 작동한다는 착시를 만든다. 이 구조가 굳어지면, 권력자는 언제든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지울 수 있다.

 

남한의 종북 좌파는 왜 “박헌영”을 말하지 못하는가

 

박헌영은 종북 좌파에게 불편한 거울이다. 그는 북한 권력의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였고, 반공 진영이 아니라 공산 진영의 핵심이었다. 

 

그가 “미제 스파이”로 처형되는 장면은, 북한의 정치가 “적대 진영과의 투쟁”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북한의 정치는 내부 동지를 먼저 정리하며 돌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더라도 건너뛴다. “복잡했다” “자료가 부족하다” “양쪽 다 문제” 같은 말로 문장을 끝낸다. 

 

그러나 박헌영 사건에서 자료는 부족해도, 실체는 충분히 보인다. 체포 시점(1953년 8월), 재판·선고 시점(1955년 12월), 이후 1956년 계파 청산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반대파 숙청의 실체를 너무나 쉽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 대신, 기록의 기준 하나

 

1953~1956년 북한의 숙청 문제는, 남한의 종북 좌파가 어떤 기준으로 세계를 보는지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박헌영 제거는 북한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쟁 직후, 권력자는 패전의 책임을 타인에게 넘겼고, 당은 법을 끌어와 공포를 유통했으며, 남로당 잔존 세력은 조직째 지워졌다. 그리고 남한의 종북 좌파는 그 앞에서 침묵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가담의 한 방식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북한 권력의 방식에 도덕적 면죄부를 발급했다. “정의”를 말하던 입이 북한의 숙청 앞에서 멎는다면, 그 정의는 애초에 정의가 아니었다. 진영의 이익을 도덕으로 포장한 문장들일 뿐이었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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