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집] 은폐된 46년의 공백… 폭도 총맞아 죽을지 공포에 떤 계엄군
1980년 5·18 당시 총·칼·낫·곡괭이를 든 무장 폭도들에게 포위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계엄군 장병들의 피맺힌 절규가 담긴 자필 수기가 5·18의 진실의 퍼즐을 채워줄지 관심을 끌고 있다. ‘가해자’라는 낙인 뒤에 숨겨진 계엄군의 절절한 비애가 담긴 수기는 46년간 ‘학살자’로 매도돼 온 그간의 계엄군 이미지와 큰 괴리를 낳고 있다. <한미일보> 취재진이 2년 전 단독 입수한 ‘광주사태 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체험담’은 폭도들의 무장 공격으로 공포에 직면한 장병들이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에서 생존을 갈망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뇌와 애환·절규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 이 대통령,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 [사진=대통령실]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선다. 그러나 그 신뢰는 권위자의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뢰는 검증을 통과할 때 생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국민에게 선거 결과를 믿으라고 요구하려면, 선거관리 과정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공개되고 검증 가능해야 한다. 절차가 닫혀 있는데 믿으라고만 하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다.
부정선거론이 모두 옳다는 뜻이 아니다. 선거 결과를 뒤집자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따로 있다. 선거관리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을 때 민주주의 사회가 어떤 언어로 답해야 하느냐다. 의혹이 틀렸다면 자료로 반박하면 된다. 주장이 허술하다면 공개 검증으로 무너뜨리면 된다. 그러나 검증 요구를 “정신질환” “거짓말” “독”이라는 표현으로 밀어내는 순간, 논쟁은 검증의 장을 떠나 낙인의 장으로 옮겨간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발언은 그 점에서 거칠다. 그는 부정선거론을 두고 “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일종의 정신질환에 걸려버린 것”이라고 했다. 또 부정선거론을 공산주의에 비견되는 위험으로 규정했고, 토론 자체도 시간 낭비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론자를 “1 더하기 1은 4”라고 주장하거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언론인 출신 논객의 언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거칠다. 더 큰 문제는 거친 표현 자체가 아니다. 논리의 자리에 낙인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선거 의혹을 반박하려면 어느 쟁점이 어떤 근거로 틀렸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사전투표 관리, 선거인명부 관리, 투표지분류기와 수검표 절차, 선관위 서버와 내부 통제, 재검표 가능성, 통계적 이질성 문제를 하나씩 놓고 따져야 한다. 그런데 조갑제 대표의 언어는 의혹 제기자 전체를 비정상으로 몰아간다. 이는 반박이 아니라 배제다.
토론을 닫는 언어
특히 “토론해 봤자 시간 낭비”라는 태도는 민주주의 언어가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입문이다. 그 출입문에 대한 의문은 가장 공개적으로 토론돼야 한다. 토론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검증이 끝났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검증의 장을 닫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검증으로 이길 수 있다면 낙인이 필요 없다. 자료가 충분하다면 토론을 피할 이유도 없다. 부정선거론이 틀렸다면, 틀렸다는 사실을 공개 자료와 절차 검증으로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정신질환”이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토론이 필요 없는 것인가, 아니면 토론을 감당할 논리가 부족한 것인가.
조갑제 대표는 아주경제 인터뷰에서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 선거가 전자개표가 아니며, 수개표이고 마지막에 분류만 기계로 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또 부정선거론을 “정신질환”과 “감염”의 언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선거 개표 절차의 핵심 쟁점을 단어 하나로 좁혀버리는 방어 논리다.
“수개표”라는 방어 논리
한국 선거에서 투표지분류기가 법적으로 개표사무를 보조하는 장치라는 설명은 존재한다. 중앙선관위 선거사료 소개도 투표지분류기를 개표사무원의 피로를 낮추고 신속한 개표를 위해 도입한 장비로 설명한다. 투표지분류기는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처음 사용됐고, 이후 여러 차례 개량돼 2024년형 신형 분류기까지 도입됐다.
그렇다고 “전자개표가 아니라 수개표”라는 말이 충분한 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지는 투표지분류기를 거쳐 후보자별·정당별로 분류되고, 이후 사람이 확인하는 절차와 심사계수 절차를 거친다. 선관위가 2024년 총선을 앞두고 기존 ‘투표지분류기→심사계수기’ 흐름 사이에 사람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수검표 단계를 추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선관위는 기존 절차에 ‘분류기→육안심사→심사계수기’ 구조를 추가하는 방향을 추진했고, 이후 수검표 절차는 제22대 총선에 도입됐다.
따라서 쟁점은 명칭이 아니다. 핵심은 투표지분류기가 어떤 방식으로 투표지를 인식하고, 어떤 기준으로 재확인 대상을 분류하며, 오류 가능성은 어떻게 점검되고, 수검표가 실제로 그 오류를 얼마나 걸러내는지다. 민주주의의 답은 “그건 전자개표가 아니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장비별 오류율, 재확인대상 비율, 수검표 보정 결과, 장비 로그와 이미지 보존 방식의 공개다.
선관위는 2024년 총선 뒤 투표지분류기가 후보 기호를 섞어 분류한 오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일부 개표소에서 분류기가 작동하지 않아 예비 분류기를 사용한 사례는 있었지만, 후보 간 오분류 오류는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검증 요구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이런 자료가 선거 때마다 더 구체적으로 공개되고 축적될수록 신뢰는 강해진다.
문제는 전자개표냐 수개표냐가 아니다. 기계가 개입한 개표 공정 전체가 국민 앞에 검증 가능하게 열려 있느냐다.
체인 오브 커스터디의 문제
선거에서 더 중요한 개념은 체인 오브 커스터디(chain of custody)다. 우리말로 풀면 ‘투표지와 선거자료의 연속 보관·관리 기록’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의 투표지·장비·전자기록을 넘겨받고 넘겼는지를 시간순으로 남기는 절차다. 미국 선거보안 분야에서도 체인 오브 커스터디는 투표지나 투표 장비 같은 선거 물품의 통제와 이전 과정을 문서화하는 기록으로 설명된다. 물리적 장비뿐 아니라 전자기록과 전송 자료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 조갑제 대표의 “수개표” 주장이 왜 불충분한지 더 분명해진다. 설령 최종 판단을 사람이 한다 해도, 투표지가 유권자의 손을 떠난 뒤 투표함에 들어가고, 투표소에서 개표소로 이동하며, 분류기를 통과하고, 재확인 대상으로 분류되고, 수검표와 심사계수를 거쳐 개표상황표로 옮겨지는 전 과정의 연속 관리 기록이 남아야 한다. 어느 단계에서 누가 봉인을 확인했는지, 언제 봉인이 해제됐는지, 어떤 장비에 투입됐는지, 장비 로그는 남았는지, 이미지 파일은 보존됐는지, 참관인이 어느 단계까지 확인했는지가 검증 가능해야 한다.
투표지는 종이가 아니라 국민주권의 증거물이다. 증거물에는 믿음이 아니라 관리 기록이 필요하다. 체인 오브 커스터디가 탄탄하면 부정선거 의혹은 약해진다. 반대로 그 기록이 허술하거나 공개 검증이 어렵다면 “수개표”라는 말만으로 신뢰를 요구할 수 없다.
선거 신뢰는 말로 생기지 않는다. 투표지 한 장이 유권자의 손을 떠난 뒤 최종 집계에 반영되기까지의 모든 경로가 추적 가능해야 한다. 그것이 선거의 체인 오브 커스터디다. 이 원리를 빼놓고 “전자개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검증의 핵심을 비껴간 것이다.
정규재의 경우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의 경우는 조갑제 대표와 결이 조금 다르다. 정규재 전 주필은 선거부정론이 보수 공론장을 지배하는 언어가 됐다고 비판했고, “선거부정론은 보수를 죽이는 독”이라고 했다. 월간조선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펜앤드마이크 대표 시절 선거부정과 관련한 의혹 유형을 반박하는 영상을 제작했다고도 했다. 이 점에서 정규재 전 주필을 조갑제 대표처럼 단순한 낙인만의 언어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규재 전 주필의 언어 역시 문제를 남긴다. 그는 부정선거론을 믿는 사람들을 “비이성적” 또는 “반이성적”이라는 취지로 표현했고, 선거부정론을 보수를 죽이는 독으로 규정했다. 월간조선 인터뷰에는 그가 해당 표현을 일부러 세게 썼다고 설명한 대목도 나온다.
문제는 여기서도 같다. 선거 검증 요구와 정치적으로 신념화된 부정선거론은 구분돼야 한다. 누군가 선거 결과 전체를 부정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사실처럼 단정한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선거관리 시스템의 취약점, 선관위의 설명 책임, 개표 절차의 투명성, 재검증 가능성을 묻는 요구까지 같은 바구니에 넣어 “독”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검증 요구를 위축시킨다.
검증 요구는 민주주의의 권리다
부정선거론을 비판하는 것과 선거 검증 요구를 봉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민주주의적 논쟁일 수 있다. 후자는 민주주의의 자기정화 장치를 약화시키는 일이다. 선거 신뢰는 “믿으라”는 말로 생기지 않는다. 믿을 수 있도록 보여줄 때 생긴다. 절차를 공개하고, 자료를 남기고, 의문에 답하고, 반론을 허용할 때 신뢰가 쌓인다.
조갑제 대표와 정규재 전 주필의 공통된 한계는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부정선거론의 정치적 폐해를 강하게 말했지만, 선거관리 시스템을 국민 앞에 더 열어 검증하자는 요구까지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 조갑제 대표는 의혹 제기자를 병리화했고, 정규재 전 주필은 이를 보수 진영의 독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질문은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 절차를 향한다. “누가 이상한가”가 아니라 “절차는 검증 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민주주의다.
선거를 믿으라는 말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를 검증할 수 있어야 믿는다는 태도가 민주주의다. 그 검증 요구를 낙인으로 막는 사람은 부정선거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신뢰 회복의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다.
조갑제 대표와 정규재 전 주필이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검증 요구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낙인의 대상이 되는가. 왜 시민의 의문은 자료로 반박되기 전에 정신질환, 독, 반이성이라는 말로 밀려나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신뢰와 검증을 함께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검증을 빼고 신뢰만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의 언어가 아니다. 권위의 언어다.
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하늘이 다 보고있다. 부정선거와 관련된 것들은 옛날말로 하면 3족을 멸해도 그 죄가 사함받지 못한다. 자유 대한민국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짓이므로. 보자, 어디까지 진실을 감출 수 있는 지. 하늘이 어떻게 심판을 하는 지.
조갑제와 정규제가 부정선거가 없었다고 입에
개거품이 나오도록 짖어 대는 것이
역설적으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조갑제와 정규제는 본인들의 말로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비참할 것!
저들은 양심을 팔아버린 것 같다. 양심을 팔아서 무엇을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