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어제는 휴일을 맞아 잠시 뉴스의 창을 닫고 가족 곁에 머물려 했다. 쉽사리 평안이 찾아오지 않는 얄팍한 내면만 확인했을 뿐이나, 스스로를 강제로 격리하는 것만으로도 얕은 평온을 흉내 낼 순 있었다.
밤새 뒤척이며 조금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역사의 궤적을 되짚었다.
무균실의 파시즘과 잃어버린 관용
국가 문명이 쇠락하는 조짐은 늘 일상의 틈새에서 움튼다. 오늘날 좌파 진영이 주도하는 맹렬한 사상검증과 머지않아 닥칠 ‘입틀막법’의 그림자에서 역사의 뼈아픈 인과율을 본다. 다가오는 제도적 폭력 앞에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일상의 고요 속에서도 이 근원적 질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전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조지 오웰은 “자유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라고 통찰했다.
인류 문명은 이견을 품는 관용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구호가 아닌 진정한 의미로 ‘진보’했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란, 오직 그들 스스로 듣기 편한 소리만 독점할 권리로 전락했다. 특정 커피 브랜드, 십 대 소녀의 사투리, 자영업자의 밥반찬 물가 타령까지 샅샅이 뒤져 이념적 잣대를 들이미는 행태는 지성의 빈곤을 넘어선 명백한 퇴행이다.
그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조차 “자유란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라고 일갈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끼리 패거리를 지어 도덕적 우월감을 향유하는 짓은 얄팍한 이익 공동체의 결속일 뿐,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에블린 비어트리스 홀의 선언 앞에서 작금의 사상 통제는 한없이 궁색하다. 상대를 짓밟고 입을 틀어막아야 연명하는 사상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낡은 도그마일 뿐이다.
진영 논리가 팩트를 덮어버릴 때
더 큰 비극은 파편화된 사상검증의 광기가 ‘입틀막법’이라는 제도적 권력을 두르고 국가 단위의 억압으로 진화하려 한다는 데 있다. 사회의 모든 갈등과 이견을 표백해 거대한 무균실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언제나 획일화된 폭력을 낳았다.
“참과 거짓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체주의 지배의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라던 한나 아렌트의 경고를 잊어선 안 된다. 맹목적인 진영 논리가 일상의 팩트를 덮어버릴 때 대중은 사유를 멈추고 권력에 순응한다. 타인의 사소한 일상을 꼬투리 잡던 저열한 광기가 결국 법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의 목줄을 죄는 것,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인과율이다.
국가의 건강함은 갈등을 억지로 도려낸 무균 상태에서 오지 않는다. 다소 시끄럽고 불편하더라도 이질적인 목소리가 억압 없이 교차하고 충돌할 때 공동체는 썩지 않고 전진한다. 입버릇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며 타인의 일상을 옥죄는 자들에게 역사의 이름으로 묻고 싶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자유’라는 단어가 진정 빛을 발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오직 당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용인할 때뿐이다.
내 입맛에 맞는 말만 허용하는 통제된 평화는 사육장 속 가축의 안일함과 다르지 않다. 불온하고 불편한 목소리마저 기꺼이 감내하는 묵직한 관용, 그것만이 이 국가를 획일화된 야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유일한 방파제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