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LG·SK 등 한국 기업들, 글로벌 평가사의 ESG 점수판 앞에 서다. 자율은 사라지고 금융 종속만 남았다. 한미일보 그래픽
보고서가 점수표로 변한 순간
한국의 상장기업들은 매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기업 이미지 관리 차원의 선택 사항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ESG 공시 의무화를 선언하면서, 이 보고서는 사실상 규제 문서가 됐다.
금융위는 2025년까지 코스피 상장사 전부에 ESG 공시를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2030년까지는 코스닥 기업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기업들은 회계·환경·노동·지배구조 전 분야의 데이터를 수집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형식은 자율이라지만, 사실상 글로벌 평가사 기준에 맞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글로벌 자본의 점수판
ESG 점수를 매기는 주체는 MSCI, 서스테이널리틱스, S&P 글로벌 등 글로벌 평가사다. 이들은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등급을 부여한다. MSCI의 경우 AAA부터 CCC까지 7등급을 매기는데, 등급이 낮으면 대형 연기금과 글로벌 펀드가 투자를 철회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이다. 블룸버그 조사에 따르면 동일 기업의 ESG 점수가 평가사마다 30% 이상 차이나는 경우가 흔했다. 삼성전자, 현대차 같은 대기업도 A등급과 C등급을 동시에 받는 사례가 발생했다. 결국 기업은 평가사의 자의적 기준에 휘둘리며, 글로벌 자본의 ‘점수판’ 앞에 무력해진다.
K-ESG의 족쇄
한국 정부는 2021년 ‘K-ESG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한국형 기준”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상은 국제 기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대기업은 전담 부서를 만들어 대응했지만, 중소·중견기업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에 시달린다.
중견 제조업체 관계자는 “환경 데이터는 정부 기관에도 없는데, 기업 보고서에서 내놓으라 한다. 회계·노동·인권까지 전 분야를 작성해야 하니 사실상 행정 마비 수준”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우리가 혁신할 시간보다 보고서를 채우는 시간이 더 길다”고 토로했다.
ESG 채권, 승인 없는 길은 없다
기업들은 ESG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다. ‘녹색 채권’, ‘사회적 채권’, ‘지속가능 채권’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는 이 채권은 투자자에게 매력적 상품이다. 2023년 한국의 ESG 채권 발행 규모는 80조 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발행 조건은 까다롭다. 국제 인증기관의 검증을 받아야 하고, 글로벌 평가사의 점수도 일정 기준 이상이어야 한다. 승인 없이는 투자자가 모이지 않는다. 사실상 국제 금융권의 문턱을 넘어야만 자금 조달이 가능한 구조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다. 기업은 채권을 발행했지만, 비용은 결국 상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에 전가된다. 국민이 소비자로서 부담하는 셈이다.
사라지는 기업의 자율성
ESG 점수판이 작동하는 순간, 기업의 자율성은 사라진다. 경영진은 시장 수요보다 보고서 작성에 집중하고, 혁신보다 점수 맞추기를 우선시한다. 일부 기업은 기술 개발 대신 단기적으로 점수를 높일 수 있는 항목(예: 종이컵 사용 감축, 친환경 인증 확보)에 자원을 몰아넣는다.
그 결과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자율적 전략 대신 국제 자본의 요구에 맞춘 경영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자본의 하청 구조”**라고 부른다.
국제 비교, 미국 vs 유럽
ESG를 둘러싼 국제 흐름도 엇갈린다. 유럽연합(EU)은 2021년부터 ‘지속가능금융 공시규정(SFDR)’을 시행해 모든 금융기관에 ESG 공시를 의무화했다. 2024년부터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까지 확대된다. 한국은 이 모델을 그대로 수입하고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ESG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공화당 주(州)들은 “ESG는 자국 산업을 죽인다”며 주 연기금의 ESG 투자 금지를 선언했다. 블랙록과 같은 자산운용사가 보이콧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국이 선택한 길은 명백하다. 유럽식 ESG 종속 모델이다.
금융 종속의 덫
결국 ESG 공시와 점수판은 기업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국제 금융 종속을 심화시킨다. 환경을 지키겠다는 명분은 금융 권력이 만든 표준으로 변질됐다. 기업은 점수판을 따라야 하고, 국가는 정책 자율성을 포기해야 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구호는 곧 “지속가능한 금융 지배”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한국이 스스로 규범을 설계하지 못하는 한, ESG는 주권적 경영이 아니라 금융 종속의 굴레일 뿐이다.
<다음 편 예고>
④편에서는 ESG 비용이 어떻게 국민과 기업에 전가되는지 추적한다. 전기요금과 세금은 늘고, 금융권만 웃는 구조를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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